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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언니 Dec 05. 2023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면 (1)

자신이 밥을 먹을 때 내가 굶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봐주는 사람,
내가 아팠다가 며칠이 지나 괜찮아졌다 말해도 차도를 되물으며 걱정해주는 사람,
조금 느릴지언정 내 가족과 나의 일,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
나를 소중히 여기기에 관계가 틀어질까 곧 되돌아오는 사람,
나와 대화하고 함께하고 싶은 것이 속절없이 느껴지는 사람,
우리의 대화, 습관, 추억들을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

 이러한 행동이 지속된다는 것, 그것은 서로 맺은 관계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남편과 살다보니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공감능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임신 7개월쯤이었나,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되자 여기저기 에어컨을 틀어놓은 탓에 감기에 된통 걸린 적이 있다. 임산부는 약을 함부로 먹을 수가 없으니 오롯이 감기를 앓아내야 했던 난 뜨끈한 국밥을 먹고 푹 자거나, 도라지 배청을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는 식으로 버텼다. 코는 막히고, 목은 따갑고, 미열까지 있는 딸을 위해 엄마는 뜨끈한 육개장을 끓여주셨다. 입맛이 없었지만 태아를 위해, 그리고 그 더운 날 에어컨도 못 켜고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애쓴 엄마를 생각해 육개장에 밥을 후루룩 말아 먹었다. 


 날이 저물고, 일찍 잠드는 게 낫겠다 싶어 저녁 9시쯤 “이제 그만 자야겠어.”라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일찍? 할머니도 아니고 되게 일찍 자네.” 읊조리는 듯한 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탁! 스위치 소리와 함께 거실이 어두워지고 이내 TV가 켜졌다. 우리집은 안방 문을 닫으면 공기가 전혀 순환되지 않는 구조라 안방 문을 아예 떼어놓았기 때문에 거실의 소리가 안방에 고스란히 들려온다. 잠귀가 밝은 편인지라 TV소리가 거슬렸지만, TV 끄고 자라고 부탁할 힘조차 없었기에 이리저리 뒤척이며 선잠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뭐지 싶어서 눈을 뜨고 거실로 나갔더니 TV를 보며 깔깔대고 있는 그와 켜져 있는 에어컨이 보였다. 희망온도 18도. 


에어컨 켰어?

어. 너무 더워서 틀었는데?


 무슨 문제 있냐는 식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자 마냥 서러웠다. 하지만 울 힘도, 서럽다고 말할 힘도 없어서 “내가 감기에 걸려서 좀 추워. 선풍기 쐬면 안 될까?” 하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TV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으로 들어온 그는 평소처럼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었다.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코 고는 소리와 함께. 나는 조용히 거실로 나와 소파에서 잠들었다.






 결혼하자마자 임신과 출산까지 이어지자 몸이 많이 쇠약해지고, 임신 당시 불어난 몸무게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몸 이곳저곳에 이상이 생기곤 했다. 결혼 전에는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는데, 환절기만 되면 감기를 심하게 앓는 등 나는 튼실해진 겉모습과는 달리 병약해져 갔다.


 결혼 4년차쯤의 어느 일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왼쪽 눈이 부어 있었다. 다래끼는 아닌 것 같은데 꽤 부어 있었지만, 그날은 교회에 갔다가 바로 시댁에 가야 했기에 나의 부은 눈 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시댁으로 향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운전하여 어머님, 아버님을 모시고 공주, 남편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시부모님과 아이를 태운 차를 운전하면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터라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밤까지 일정은 계속되었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공주를 먼저 씻기고 재우고 나니 11시, 난 외출하느라 미뤄둔 집안일과 샤워를 하고 새벽 1시에나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부어 있었던 왼쪽 눈이 아예 떠지지도 않는 상태였지만 출근은 해야 했기에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어찌어찌 출근은 했지만, 회사에 도착하자 왼쪽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고 심한 두통까지 찾아왔다. 결국 출근한 지 2시간 만에 조퇴하고, 집 근처 신경외과로 향했다. 진료 결과 병명은 대상포진. 의사는 왜 이제야 왔냐며 질책했다. 안면에 오는 대상포진, 특히 눈가에 오는 대상포진 바이러스는 시신경을 건드릴 수 있다며 MRI와 여러 가지 검사를 권했고, 난 회사에 급히 전화로 사정을 알려 병가를 낸 후 입원하게 됐다.


 MRI 검사 결과를 들으러 진료실로 들어섰는데, 진료실의 공기가 왠지 무거웠다. 나이가 지긋한 신경외과 원장선생님은 결혼 전에도 몇 번 뵌 적이 있어서 익숙한 분임에도 그날의 그 공기는 꽤나 낯설었다. 원장선생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전에 왔을 때 나에게 “아이를 세 명 낳으면 평생 병원비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농담도 하실 정도로 유쾌하신 분인데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 또한 긴장한 채 진료 의자에 앉았다. 



“병원에 오랜만인데 어째 대상포진을 얼굴에 달고 왔어?”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하셨다.

그러게요.” 아직 무슨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눈물이 터지기 직전처럼 목소리가 갈라지며 나왔다.

“젊은 나이에 뇌 사진이 이렇게 안 좋은 건 처음 봤어. 고생 많이 하고 살아?”

고생이요? 하하... 고생은... 안하는데...” 고생은 어떤 고생을 말하는 걸까. 마음은 썩어 갈지언정 몸 고생은 딱히 하는 것 같지 않아서 고생은 안 한다고 대답했다.

“큰 병원 가서 뇌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라며 보여주신 나의 MRI 사진 속 뇌혈관들은 곳곳이 뿌옇게 보였다.

“뇌출혈은 아니고 뇌경색인 것 같은데... 뇌경색의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급격히 증가한 체중으로 인해 혈관 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어.”라며, 곧바로 큰 병원에 이관할 예약을 잡아주셨다. 



 우리 몸에서 매우 중요한 뇌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니 한 없이 무서웠다. 먼저 남편에게 입원했다는 말과 함께 MRI 검사를 했고, 그 결과 뇌 상태가 어떻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중국으로 출장을 떠난 남편으로부터 한참 만에 답장이 왔다. 



“쓰러졌어?”

“아니.”

“금방 뭐 어떻게 된대?”

“아니, 그런 말은 없었어.”

“아 그럼 금방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네. 나 이제 막 중국에 도착했고 여기 바빠서 금방 한국에 돌아가기 어렵거든. 코로나 때문에 한국 가도 격리해야 해서 시간 좀 걸리고.”



 그의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 없었다. 그는 중국 출장 중이었고, 코로나 때문에 출장이 계속 미뤄진 터라 잠시 규제가 완화됐을 때 그동안 못했던 일들까지 처리해야 해서 바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당장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냈던 문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가 대상포진으로 입원했고, 뇌혈관의 상태가 안 좋아서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에 저런 반응을 보이자 어떠한 말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일 잘 마치고 돌아와.”라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멀리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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