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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언니 Nov 22. 2023

남편을 향한 신앙심 (1)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 다양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와 있을 땐 항상 밝게 웃었다. 처음엔 그게 좋았다. 내가 그의 구원자가 된 느낌이랄까. 그의 팍팍한 삶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는 내가 뭐라도 되는 양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은 부모님과 여동생이 있었고, 그에게서 전해들은 바로는 여타 가족들과 다르지 않게 평범했다. 언뜻 보면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였으나 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도 상처가 많았다.


 결혼할 당시 그는 10년째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 그의 아버지의 빚을 갚아드렸다고 했다. 이후에 번 돈으로는 아버지의 차를 준대형 SUV로 바꿔드렸다. 

아버님이 제 몸과 같이 여기시던 바로 그 차

나는 어느 부분에서는 그의 부모님이 꽤 이해되지 않았다. 빚을 갚아준 것도 모자라서 굳이 차까지도 준대형 SUV을 타고 다니셔야 할까 싶었지만 그와 싸움이 될까 싶어 말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가 꽤 효자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는 그의 어머니에겐 효자 재질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다소 신경질적인 부분이 많으셨고, 어머님 말로는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셔서 안 아픈 곳이 없다 하셨다. 그래서인지 항상 ‘아프다’와 같은 앓는 소리를 자주 하곤 하셨다. 실제로 결혼생활 동안 시댁에 갈 때마다 어머님은 항상 어딘가가 아프다 하셨고 병원도 자주 다니셨지만 늘 호전은 없었다. 함께 있는 시간 동안은 늘 어머님의 불편한 점과 불만사항을 경청해드리고 와야만 했는데 어머님은 그에게 잔소리가 많으셨고, 그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나 그가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을 못 견뎌하는 반면, 어머님은 아들의 행동을 꽤나 통제하길 원하셨다. 하지만 30대 성인 아들이 입맛대로 통제가 될 리 만무했고, 그와 그의 어머니는 일상다반사로 아웅다웅했다.




 제3자였던 내가 보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와 그의 친척들의 관계였다. 나는 결혼 준비를 하면서 그의 친척들을 자주 봐야만 했다. 한국 사회가 기존 틀에서 많이 변화했다고는 해도 아직은 전통처럼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보니 여기저기 인사를 드리러 다녔다. 특히 그의 어머니 쪽, 그러니까 그의 외갓집 식구들을 자주 만나야 했다. 

 결혼 전을 포함하여 결혼생활 내내 그의 친가 쪽 어른은 고모님 외에는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외할머니에게 인사드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명절마다 그의 외갓집을 (추가로) 방문해야만 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는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외사촌동생을 만나기 위해, 혹은 그분을 주제로 대화의 장을 열기 위한 핑계. 


 그의 외사촌동생은 꽤 잘 나가는 프리랜서이고, 영앤리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님과 아버님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본인의 아들이 아닌 그 사촌동생의 사진이었다. 심지어 우리 공주가 태어나고 나서도 어머님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바뀐 적이 없다. 그걸로 한동안 섭섭해 했던 내 자신이 바보 같기도 하다. 본인의 아들, 딸의 사진도 배경화면으로 해두시지 않는데 손녀사진으로 바꾸실 리가 만무한데 말이다. 


 결혼 전후로 그때의 나는 그런 상황에 놓인 그가 안쓰럽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부모님 빚도 다 갚아드린 아들보다 잘 나가는 조카가 더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걸까 싶었다. 결혼생활 6년 동안 시댁에 가면 늘 나는 원하지도 않는 그 사촌동생의 안부와 일정에 대해서 1시간 정도 경청해야만 했고, 거기에 더해 기계적이지만 그렇지 않아 보이는 리액션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왜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기 없는 삶이 되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이해는 거기까지였다.




 장남이라 그런지 그도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았다. 본인이 정한 영역의 것들만 건드리지 않고, 어떠한 선을 넘지 않으면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혼자 화를 참지 못해 치를 떠는 건 대부분 나였고, 감정에 복받쳐 울거나 감정조절이 안돼서 예민하고 조급하게 구는 것도 보통은 내 담당이었다. 그는 내가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그나마 6년의 결혼생활도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나와 같이 부딪히고, 매번 치고받고 싸우고 했다면 우린 더 짧은 시간을 부부로 살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할 말을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했다. 반면 나는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부류다. 그가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이미 다음 말을 하고 있으니 그는 더욱 입을 다물게 됐다. 겉으로 보자면 항상 이기는 쪽은 나였기에 그런 면에선 그가 참 억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가톨릭 모태신앙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도 우리 부모님처럼 종교가 같은 배우자를 데려오길 원하셨지만 그도, 나도 그 원을 이뤄드리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종교를 포기했다. 엄밀히 말해 그는 이미 냉담자였는데, 사실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어 본 적 없다고 했다. 그는 나와 같이 교회를 다니는 내내 진심으로 기도를 해본 적이 없고, 찬양시간에는 입을 다문 채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사람처럼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나는 한 교회에 20년 넘게 다니고 있었으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교회 성도님들도 내가 누구인지, 우리 엄마가 누구인지 다 알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교회에서 ‘스마일’을 유지했다. 혹시라도 “누구는 예의가 없더라.”라는 식의 소문이 교회에 퍼지는 것이 싫기 때문에 원천차단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우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후부터 꽤 빠르게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구 남편이 인사를 아예 안 한다.”, “그 사람, 설교시간에 앉아서 졸고만 있더라.”, “그 사람이 누구 권사님 사위라며?” 등등. 그는 교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쉬운 소재들을 제공했고, 나는 꽤 불편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소문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엄마는 참고 참다가 결국 그를 불러 한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그때에도 그는 무표정하게 앉아 엄마의 말을 듣고만 있었고, 그 이후에도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쟤가 나를 무시하나봐.”라는 엄마의 말에 “아직 성령님이 마음에 안 찾아오셔서 그렇겠지. 엄마도 같이 기도해줘.”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나는 그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기도는 했으나 전혀 바뀌지 않는 그의 모습에 제풀에 지쳐서 어느 순간 포기했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실 때가 언제인지 묻지도 않은 채 내가 정해놓은 시간 내에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고 내가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결국 훗날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출근 도장을 찍듯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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