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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01. 2020

보리수

리즈 마빈의 <나무처럼 살아간다>

# 나무가 되어 나무처럼 살고 싶다


2015년도 신문에서 본 어떤 이가 기고한 에세이 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세상에 나이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기품을 더하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도 나무가 되어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이들면서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마 나무 이외에도 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쓴 이도, 이 문장에 마음을 준 나도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나무밖에 없다 여기며 그러한 나무를 닮고 싶다 생각하는 것일 게다. 나무가 좋으니까.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나무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기억 나지 않는다. 우연히 읽은 나무 관련 책에서 나무를 알게 되며 더 알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사랑에 빠진 것이리라. 세상에 좋아하는 것들이 많으면 더 쉽게 행복해질 것 같았고 사소한 것에도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고 싶어서 좋아하는 목록에 '나무'를 추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나무는 나의 스승님들이다. 학창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수능준비 학원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은 일정기간 무료로 학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아마 대형 학원에서 학교에 소수 학생에게 제공하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말없이 내 공부를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대학원에서 뵌 나의 지도교수님은, 교수님의 첫 제자였다. '첫' 제자이기도 했고 교육에 열정적이신 분이셔서 자신의 오랜 지식을 고스란히 나에게 알려주시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어렵게 일본에서 유학하시며 힘들게 쌓은 지식들, 보물과 같은 그 지식을 교수님께서는 아낌없이 전해 주셨다. 그 외에도 나의 가정형편을 배려해주시며 학업을 응원해주시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집이 어려워도 공부를 잘하진 못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좋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나의 이런 스승님들 덕분이다. 나에게 선생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다. 


# 서툴러도 괜찮아


마음이 허전할 때, 시간이 공중에 떠다니는 느낌이 들 때, 책이 도저히 읽히지 않고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 그럴 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도 사실 많지만 그럴 때 나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림 그려볼까? 라고. 이 나무 그림은 그런 날 그리고 싶었던 나무다. 

리즈 마빈의 <나무처럼 살아간다>에 보면 약 50종의 나무 그림과 그 나무의 특징이 나온다. 그 책을 처음 읽은 날, 내 맘대로 그 책의 활용법을 바꾸어 버렸다. 닮고 싶은 나무를 그림으로 그리자, 그럴 때 다시 펼치자고. 


완성된 그림을 바라본다. 역시나 서툴다. 사실 수채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없어서다. 연필 선이 그대로 드러나 서툰 실력이 더 많이 티난다. 짙은 유화는 밑바탕이 보이지 않고 못 그려도 추상화라고 우길 수 있지만 일상 소재를 그린 수채화는 민낯의 얼굴처럼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 부끄럽다. 그럼에도 수채화여야만 했다, 이 나무는. 그리고 괜찮으니까, 서툴러도.


서툴러도 괜찮은 공간. 잘하지 못해도 부끄럽지 않은 공간.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즐길 수 있는 공간. 그것이 나에게 그림이다. 잘하지 못해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그림은 그런 곳이다.


#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쓴다


"'영성'이란, 이 세상 나무의 종류만큼이나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든 먼저 당신을 평온함으로 이끌어줄 내면의 목소리를 만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게 시작이다. 보리수는 매우 영적인 나무로 손꼽힌다.  (...) 이 나무에서 조금씩이라도 긍정적인 믿음을 얻을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리즈 마빈의 <나무처럼 살아간다>, Denstory, 2020, p129)


나는 책을 읽듯 내 마음을 읽곤 한다. 나는 묻는다, 나에게. 이 나무가 왜 그리고 싶었니, 라고.

 

요즘 나 자신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예전에는 진하고 선이 분명한 물감으로 그린 나였다면, 이제는 수채화처럼 물감의 농담 조절이 가능하고 색과 색의 경계가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빨강과 파랑이 선 하나로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않고, 빨강이 점차 연해지다 연한 파랑을 만나 빨강이 진한 자주빛에서 파랑이 진한 남색으로 바뀌다 파랑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얽힌 실 같은 문제들을 들여다보면 결국 나를 바꾸면 되는 것들이 많다. 내가 바뀌면 되는데 늘 상대를 바꾸고 싶어했고 상황을 바꾸고 싶어했고 그러다 지치면 떠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뿐인 것을 머리만 알고 가슴과 피부가 알지 못했다. 안다고 믿고 있었을 뿐 알지 못했다. 


이제 나에게는 종교가 없다.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지도 않는다. 대신 나는 이렇게 적는다. 기록이 나에게 기도이며 그림이 기도이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내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삶은 순리대로 흘러가고 있으며 분명 그 길은 잘못되지 않았음을 믿고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매일 해나가려 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과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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