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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r 23. 2021

쓰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웅진지식하우스, 2020)

# 그녀가 보고 싶다     


주기적으로 내 안에서 떠다니는 단어들이 있다. 허무함, 공허함도 그중 하나다.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허무하단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지만 지나온 시간 동안 각자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너무 달라져 ‘친구’라는 이름 외에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관계가 되거나, 사회에서 만났지만 사적으로 평생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그녀에게 닥친 건강상의 문제로 만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말의 무게가 비슷한 사람, 서로의 마음이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꿈꾸는 것이 왠지 욕심이자 집착처럼 느껴진다. 내 안의 허무함과 공허함은 어쩌면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의 짐일지도 모른다.     


살고 싶다는 농담     


이 제목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살고 싶다와 농담이 만난 이 문장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매번 눈물이 난다. 그리고 보고 싶은 그녀를 떠올린다. 누구보다 삶을 즐겁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녀. 그녀가 보고 싶다. 건강해지면 만나요,라는 말을 두 해째 안부 인사 말미마다 나누고 있다. 소중하다는 단어와 어울리는 그녀. 이 책을 보니 다시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 같이 죽자, 그래     


행복하다는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마다 그것을 정의하는 언어는 다를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나의 행복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그를 만난 이후 나에게서 사라진 감정 중 하나가 우울함이다. 때론 다투기도 하고 서로에게 상처 줄 때도 있지만, 한 발 한 발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며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고 서툴기 그지없는 우리. 하지만 나는 그로 인해 우울함이라는 감정을 잊고 지낸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다는 느낌을 어떻게 아는가, 라고 묻는다면, 오랫동안 고질병처럼 앓고 있던 우울함을 잊고 있기 때문에, 라고 답하리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그로 인해 행복하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삶에 미련이 없어. 이미 충분히 행복하거든. 그래서 만약 큰 병에 걸린다면 치료하지 않을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고 그는 말했다. “같이 죽자, 그래”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그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행복하지만 살고 싶다는 감정을 사실 난 잘 모른다. 건강한 자의 오만일 것이다. 살고 싶다는 감정은 모르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읜 그를 보며 그에게 또다시 누군가의 죽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한다. 내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인 한, 말이다.      


그의 부모님은 가끔씩 나의 꿈에 나오신다. 사진으로밖에 뵌 적 없는 시부모님이 내 꿈속에 나오셔서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라고 말씀하시듯 자상한 미소를 보여주신다. 정작 아들 꿈속에는 나오지 않으시면서 말이다.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평생 사사로이 남을 속이지 않고 맡은 일에 성실하며 타인을 배려했던 보통사람이었다. 평생 사사로이 남을 속이지 않고 맡은 일에 성실하며 타인을 배려했던 보통사람이었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결코 좌절하는 법 없이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보통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식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보통의 어머니였다. 보통사람 말이다. 그런 보통사람 최은희의 삶에 대해 꼭 남기고 싶었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그의 부모님께서 내 꿈에 찾아오시는 이유를 지금은 알 수 없기에 이렇게 글로 적어둔다. 언젠가 비밀의 열쇠를 찾아 이 이유를 해독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1등, 최고, 부자, 영웅, 위인처럼 대단한 사람을 기록하는 것보다 나에게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을 잘 챙기지 못하여 소중한 사람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후회하고 마는 나. 그런 나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알려주시려고, 어쩌면 그의 부모님이 내게 찾아오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나는 더 이상 뜨겁게 살지 않는다     


5년 후, 10년 후의 목표를 정하여 1년마다 체크하기. 매해 연초에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올해 이루어야 할 목표들을 수첩에 기록하고 연말마다 얼마나 지켰는지 체크하기.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나누어 그날 했던 일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잠들기 전에 그 시간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반성하기. 이러한 작업들을 지켰던 때가 있었다. 약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뜨겁게 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오래되었고, 실제 그렇게 살게 된 것은 1년 정도 되었다. 병상에서 여러 번 생각했다.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 번 살아봤으니,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 안에서 열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시점이. 아무리 꿈을 꾸고 노력해도 깨진 독처럼 부족하기만 한 노력 앞에서 지쳐버렸던 것일까. 혹은 아무리 계획해도 클리어하지 못하고 매해 반복되는 꿈의 목록을 바라보는 것이 버거워진 탓일까. 어느 시점부터 나는 더 이상 먼 꿈을 위해 하루를 숨막히게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저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월급날을 기다리고 휴일이면 최대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월요일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잘 살고 있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안심하게 만드는 ‘회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구직자의 이름표를 달게 될 때, 그때마다 나는 이력서 앞에서 매번 침전한다. 매대 위의 세일 상품처럼 구차하게 나를 설명하고 돌아봐달라고 구걸한다. 연도와 연도 사이에 비어 있는 경력을 보며 당시의 나는 무엇을 했는지 생각에 잠긴다. 돈을 벌지 못했던 때는 마치 숨 쉬지 않았던 시기인 것만 같다. 죄책감마저 든다. 여러 번의 이력서 앞에서 아마 나는 꿈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안의 열정은 차츰 식어갔는지도 모른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다고 믿고 있지만 유독 그 말이 나 자신에게만은 다가오지 않는다.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꿈을 꾸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의 나는 아마 결론보다는 매일 매일의 결심 자체에 설레했을 것이다. 노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묵묵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내면서 꿈이 이루어진 마지막 그날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현실의 벽을 알아버렸다는 어줍잖은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비겁한 자조와 비관 뒤에 숨어서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허지웅 작가의 글이 좋다. 그의 글은 날카롭지만 부드럽다. 차갑지만 포근하다. 단호하지만 내치지 않는다. 무겁지 않지만 힘이 있다. 그런 그가 나에게 말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라고. 마음이 가난한 어른의 얼굴을 벗어버리고 핑계는 그만 대고 얼른 다시 꿈을 꾸어 보라고 말한다. 이루어지지 못할까봐 꿈조차 숨기는 비겁한 어른이 되지 말라고, 그는 나에게 말한다.     


# 쓰고 싶다는 농담     


사실 나는 모든 것이 두렵다. 허무함과 공허함이라는 단어는 외롭다는 단어를 숨기기 위함에 불과하다. 사람을 소중히 여겨오지 못했던, 변명만 가득했던 지난 날의 선택의 결과가 너무나 무거워 구차하게 꺼낸 가면이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렵고 두려워서 미리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나를 채운다. 그리고 이 허무함과 공허함을 숨기기 위해 글을 쓴다. 두렵고 외롭고 슬픈 감정이 두려움으로 변하지 못하도록 글을 쓴다. 하지만 나의 쓺 또한 결국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쓰지만 쓰지 못할까봐 두렵고 쓰지만 읽히지 못할까봐 두렵다. 두렵지만 두렵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꿈이 아니라고 배신한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듣지 못했던 말을 모두 털어냈다. 나는 앞으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있다. 어디서부터 무언가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가 잘못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후회와 비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살아내는 것 뿐이다.      


살고 싶다는 감정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또 하나의 이별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쓰고 싶다. 하지만 두렵다. 두렵지만 쓰지 않는 삶은 나에게 있어 살아 있지 않음과 같다는 것 또한 안다. 쓺이 안겨줄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심할 수밖에 없다.


 쓰고 싶다는 농담, 이것이 허지웅 작가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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