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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ug 28. 2021

결국 오늘 난 또 염색을 했다

이십 대 중반부터 흰머리가 조금씩 나기 시작하더니 이십 대 후반, 논문을 쓰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500원짜리 모양으로 흰머리가 났다.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 원형 부분만 염색하면 되니까. 그렇게 삼십 대를 보내고 사십 대가 되자 이젠 전체적으로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다. 이건 누가 뭐래도 새치라 부를 수 없는 영역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흰머리는 유전인 듯 싶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주기적으로 염색을 했다. 그땐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보곤 했는데 돌아보면 그때의 엄마 나이는 아마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거의 환갑이 되어서야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둘째 언니는 아빠를 닮았는지 사십 대 중반인 지금도 흰머리가 몇 가락 없다. 유전의 신비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성격은 아빠와 그대로 닮았으면서도 이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엄마를 닮았다. 그러나 피부가 약했던 엄마를 닮은 건 또 내가 아니라 언니들이다.      


코로나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요즘, 중요한 일이 없는 한 염색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자라난 뿌리 끝 흰머리의 길이로 시간을 알 수도 있다. 내 몸이 살아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다 염색을 해야 하는 날이 오면 언제까지 이렇게 염색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흰머리를 그대로 두기로 선언한 내 또래 남자 연예인 기사를 본 적은 있다. 하지만 내 또래 여자들 중에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아는 언니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의 머리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려 있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이고 나 또한 흰머리가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있었는데 언니는 그게 부끄러웠던지 이렇게 염색하지 않고 희끗희끗한 상태로 다니면 게을러 보인다는 핀잔을 듣는다고 했다. 여자에게 흰머리는 노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나이 들어도 염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늙을 거라고 말한다. 흰머리가 멋진 사람이 되겠다고. 그래서 나더러도 염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차마 나도 염색 안 할래, 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고는 싶어도 사회생활을 하는 한 그게 내 뜻대로는 안 된다. 아, 이 말을 하고 보니 나도 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동안 나는 내 의지와 나의 옳음으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흰머리를 보면 나도 결국은 타인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타인의 시선과 잣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건 안다. 분명 머리로는 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결국 나도 남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옷과 유행하는 옷. 분명 나의 몸에 가장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는데 길거리의 많은 여자들이 입는 옷이 그와 다르면 어느샌가 나의 ‘좋음’이 ‘싫음’으로 바뀌어 있다. 타인을 보지 않았다면 ‘좋음’ 그대로였을 텐데. 그리고 나 스스로를 설득한다. 유행을 좇는 일반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줏대 없이 남들 따라 하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나는 다만 이 옷으로 취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 사는 것뿐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합리화한다.  

    

언제까지 나는 염색을 할까. 아빠가 염색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건 아마 70대가 다 되어 가셨을 때다. 하얀 눈이 가득 쌓인 아빠를 보며 왠지 마음이 애잔했다. 늘 나에게는 젊은 시절의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흰머리 가득한 아빠는 ‘노인’으로 보인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들 머리의 흰머리를 보면 마찬가지로 마음이 왠지 아리다. 흰머리가 애잔해 보일 이유가 없음을 알면서도 마음이 나도 모르게 애잔해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 아닐 텐데도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감사함 없이 가지고 있었던 탓인지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빼앗겼다고 생각하기에 애잔하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너무 당연한 듯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한 듯 ‘소유’하고 있었기에 삶에 감사함보다는 더 주지 않는 것들에 불만을 토로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이렇게 삶과 나를 돌아보며 글을 쓰고는 있지만 결국 오늘 나는 또 염색을 했다. 타인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지금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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