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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Aug 30. 2021

꿈이란 건 그렇게 거창하고 멀 필요만은 없지 않을까

8월 말. 이제 아침 공기는 제법 선선하다. 이 선선함이 익숙해질 즈음, 차가운 공기가 찾아올 것이고 카디건 같은 겉옷 자락을 여미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다. 우리에게는 장점이 있고 그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단점이 있다. 곧 단점이 장점이고 장점이 단점이다. 익숙해져서 가까워졌고 마음을 허락했는데 익숙해진 탓에 어느 순간 감사함을 잊게 된다.      


여름 햇살의 뜨거움이 따갑고 괴롭다고 생각했는데 그 햇살이 있었기에 아침에 널어둔 빨래가 몇 시간 만에 마를 수 있었고 떡잎 두 개였던 레몬 씨앗이 여름 햇살을 듬뿍 받아 눈에 띌 정도로 훌쩍 자랄 수 있었다. 이제 슬슬 선선한 공기가 찾아오면서 숨 막히는 더위는 사라졌지만 그만큼 빨래 마르는 속도는 더디어졌고 레몬 씨앗의 성장 속도도 눈에 띄지 않는다.     


레몬이 자라는 걸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레몬을 잘라 얼려두다가 대량으로 나온 씨앗들을 그냥 버리기 아쉬워서 싹틔우기 단계 등도 거치지 않고 거칠게 흙에 넣어버린 것뿐인데도 이렇게 싹을 틔우고 떡잎 두 개를 내밀더니 한여름이 지나가는 지금은 네 개가 되었고 키도 훌쩍 컸다. 빈 화분에 거칠 게 던져둔 씨앗들이 이렇게 생명이 되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내게 생명이 찾아왔다.     


검색을 해 보니 레몬은 세 해를 지나야 한다고 한다. 아직 우리 레몬은 아기 중에서도 아기였던 거다. 세 해를 버티어야만 레몬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던데 세 해나 견디어 줄 수 있을지 자신은 없다. 한겨울을 모르는 이 아기 레몬에게 올겨울 어떤 준비를 해 줘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른 레몬 나무가 된 후에는 자잘한 환경 변화나 온도에도 잘 버틸 수 있겠지만 아직 네 잎으로 세상과 맞서고 있는 이 아이에게 영하 십도, 이십 도는 가혹할 것이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이고 가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그 사이 이 아기 레몬이 얼마나 더 자랄지, 얼마나 더 튼튼해질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레몬에게 인사하러 간다.    

 

고마운 분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이 잉크를 갈아도 나오지 않아 속상해서 종이에 한 시간 넘게 펜이 나올 때까지 선을 그으며 소원을 빌었다. 이 펜이 나오기만 한다면 더이상 바람이 없겠다, 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며칠 매일 매일 선 긋기를 했는데 아주 조금씩 나오더니 5일째 되는 날 굵은 선이 나왔다.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포기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꿈이었다. 이렇게 쉽게 꿈이 이루어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 아기 레몬에게도 똑같이 기도를 해 본다. 제발 3년만 견디어 주렴, 그래서 당당한 어른 레몬 나무로 자라주렴. 그럼 평생 너를 소중히 잘 지켜줄게, 열매를 맺지 못해도 좋으니 어른 레몬으로 끝까지 살아만 주렴, 이라고 매일 아침 잎을 만지며 속삭인다. 만년필에 대한 꿈처럼 이 꿈도 너무나 어이없게, 쉽게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꿈이란 게 너무 멀고 거창하고 손에 닿지 않는 것들로만 이루어지면 이내 지치고 만다. 꿈이란 건 그렇게 거창하고 멀 필요만은 없지 않을까. 사소하고 작은 꿈들이 자꾸 이루어지는 경험을 통해 내가 꿈꾸는 것은 모두 현실이 된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내 안에 새기고 싶다. 퍽퍽한 삶을 조금이라도 촉촉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 아직 나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칭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기에 조금 더 나를 응원해 주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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