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첫 만남임에도 마음이 편해지듯 나와 같은 색깔의 책을 만나면 읽는 내내 자신이 쓴 글처럼 술술 읽힌다. 이 책이 그랬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글쓰기를 통해 승화시킨 저자. 이는 나의 글쓰기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글로 나 자신과 대화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묻는 습관이 생겼다. 일상과 종이 한 장의 거리를 유지하며 내가 스스로 누르는 일시 정지 버튼이다. 나는 그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p30~31)”
불안을 벗어나고 불안에 대처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글쓰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며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지를 생각하다 보면 불안은 더이상 두렵지 않다. 불안뿐 아니라 다른 감정들도 그렇다. 어릴 때는 결혼이 두려웠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에 평범한 가정, 원만한 부부의 모습을 몰랐고 그것이 결혼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결혼을 했다. 그건 그런 불안들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불완전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나에게는 글쓰기다.
# 인생의 대부분은 고난의 연속이다
“행복과 아름다운 경험은 삶이 주는 선물일 뿐이다. 인생의 대부분은 고난의 연속이다. 슬픔, 낙담, 피로, 분노, 수치, 실패, 뒤처짐, 낙오, 좌절 등 선물보다 고난에 직면하는 때가 더 많다.(p92)”
항상 행복하길 바라지만 딱 잘라 말해 이건 불가능하다. 좋은 일만 생기길 바라지만 좋은 일보다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날, 그래서 감사함을 잊고 사는 날들이 더 많고, 그 사이사이에 불행한 일, 짜증 나는 일, 슬픈 일들이 간간이 생긴다. 그러다 행복한 일들이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 삶의 민낯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왜 난 이렇게 불행할까?’, ‘왜 이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없지?’라는 불만만 쌓이게 된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은 수없는 좌절에서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배워가는 것이다.(p103)”
인생길 위에 커다란 돌덩이, 혹은 자잘한 돌덩이가 내던져 있고 그로 인해 불편함과 부당함을 만나게 된다면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인생의 속성이며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뻔한 말이지만 이게 사실이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할 수 없기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어떻게 하면 지난번보다 더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덜 넘어질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나를 만난다. 나란 사람의 감정을 진정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화해해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일생을 어린 시절에 의해 치유를 받지만, 불행한 사람은 어린 시절을 치유하는 데 일생을 보낸다.(p124)”
슬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 안에는, 철이 들고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기 이전부터 새겨진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다. 문신처럼 새겨진 그 흔적들이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가치관, 성격, 신념,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때론 그 흔적이 트라우마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기도 하고 불안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화해해야 한다.(p150)”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화해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 형제들과의 관계로 생긴 문제, 트라우마는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타인이 그렇지만 부모는 절대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변하지 않는다.
“문제를 모두 부모에게 돌리면 오히려 스스로 책임지는 능력을 상실한다.(p146)”
또한 타인에게 문제를 돌린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삶의 문제를 타인이 결정한다는 뜻이 된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겨 땅에 두 발을 내딛지 못했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뿐, 스스로 뿌리 내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트라우마를 보는 것은 생명에 대한 자각이고,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무거운 수용이다. 트라우마를 용서하는 것은 위대한 자비이다. 트라우마에서 자신을 구하는 것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다.(p204)”
어릴 때부터 우는 아이에게 많이 하는 말이 ‘울지마’이다. 우는 것은 나약함의 표시이며 타인에게 민폐라는 느낌을 받으며 자란다. 슬픔도 그렇고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기에 불안이나 슬픔이 분노나 화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감정의 노예가 되고 만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을 어떻게 조절할지 방향이 보인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슬픔인지 불안인지, 혹은 그것이 분노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명확히 알 수 있고 그래야 그에 맞게 대처할 수도 있다.
#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p112)”
불안의 근원과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써 글쓰기를 제시하는 이 책에서 이상하게 난 저 질문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고난의 연속인 삶의 특성상 불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감정이다. 불안이 무조건 나쁜 감정인 것도 아니다. 불안을 통해 안이했던 일상을 돌아볼 수 있고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에 새겨진 흔적으로 인한 불안처럼 스스로 극복해야만 하는 불안도 있다. 트라우마나 상처에 가까운 이 감정은 붙들고 있을수록 내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삶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p230)”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는 곧,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다. 학창 시절에는 꿈이 곧 직업이었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이 된 이후에는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경력을 쌓고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어른으로 살면서 나도 모르게 이룰 수 있는 꿈과 이룰 수 없는 꿈을 내 안에서 구분 지으며 할 수 있는 일만을 꿈꾸게 되었다. 그게 삶의 모양이 되어 버렸다.
마흔이 넘은 지금, ‘꿈이 직업인가’라는 부분에서 생각이 멈추어 버린다. 꿈은 직업이 아니다. 되고 싶은 사람이 직업인 것도 아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직업이 아니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간이 되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상을 향해 가는 과정은 가치 있다. 이상은 자기 삶의 등대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여러 이유로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이상을 품었던 당신 삶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고 그만큼 빛난다. 누구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다. (...) 이상을 추구하는 길에서 만족과 벅찬 기쁨을 얻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보자.
품위 있는 이상은 황량한 사막의 오아시스요,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정신의 빛이다.(p117)”
이제는 꿈이라는 단어보다는 ‘이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하고 싶다’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꿈꾸게 된 지금은, 비록 이루지 못할지라도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릇의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등대가 되어 줄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이상을 조금씩 명확히 하고 싶다. 이를 도와줄 방법 중 하나가 나에게는 글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