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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선과 악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한다.

전적으로 선해 보이는 사람, 악해 보이는 사람. 나는 그런 것이 있는 줄 알았다.

요즘 드는 생각은, 한 사람 안에는 선과 악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 그것을 어떤 때 드러내 보이는가에 따라 선해 보일 수도 있고 악해 보일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거리는 참으로 어렵다. 사람들은 모두 고슴도치 같다.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선해 보이는 사람은 전적으로 선해 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어떤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숨은, 혹은 드러나는 악마저도 품게 된다는 것인가 싶다.

나의 숨은 악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늘 내 주변에 벽을 쌓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으로만 보고 싶던 사람들의 폭발하는 그 순간에 날라오는 악의 잿가루를 피하고 싶어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로지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거니와 오로지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어떤 책에서, 성격이란 어떤 상황에서 보이는 한 사람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을 찾아 정확하게 인용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분명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나온 부분이긴 한데 찾지 못했다.

한 사람의 성격을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평온한 상황이 아닌 어떤 사건과 같은 ‘상황’속에서의 그를 보아야 진정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감정의 선이 평온할 때의 그는 통제가능한 자아이다. 그것이 물론 성격의 한 측면일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전체는 아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 소위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에서 보이는 나, 혹은 우리의 모습이 어쩌면 숨겨진 그 사람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통제되지 못한 자아를 보여주는 게 두려운 게다. 통제된 자아와 통제되지 못한 자아의 갭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두 자아의 갭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다. 그리고 타인의 그 갭에도 놀라는 내가 있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타인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저자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옳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길 원하고 그렇게 보여질 것이라 착각하고 산다. 그리고 타인의 작은 결점, 작은 실수 하나에 그는 나쁜 사람이라 단정 짓고 만다. 나의 많은 실수는 실수이고 타인의 작은 실수는 성격이며 불변이다. 우리는 그저 선과 악을 모두 가지고 있는,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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