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을 읽고
그런 날이 있다.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전해야 할 마음을 도저히 내 속에 품고 있을 수 없어 편지가 쓰고 싶은 날이 있다. 남의 물건을 몰래 갖고 있는 듯 그 마음을 전하지 않는 한 마음 속 요동이 가라앉지 않는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같은 매체로는 안 된다.
글씨는 삐뚤빼뚤하고 편지지도 멋드러지지 않지만 손으로 꼭꼭 눌러 쓴 종이 편지여야만 한다.
그런 편지가 쓰고 싶은 날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수업 중에 친구들과 쪽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독서실에서 공부가 안 될 때는, 마치 연인인듯 친구들과 손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쓰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심지어 국어선생님과 교환편지를 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에게 어떻게 그런 대범함이 있었는지, 그리고 선생님은 자신의 반 밖에 살지 않았던 여고생의 그런 맹랑한 요구에 어떻게 그렇게 흔쾌히 허락해 주셨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런 날도 있다.
어떤 누구에게도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싶은 날.
나에게는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몇 개 있다. 처음부터 수신인이 반드시 필요한 편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가 필요했던 편지였기에 결국 그 '누군가'에게 가지 못하고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편지상자에 들어있는가 싶다.
그리고 나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 있다.
요 며칠, 피천득의 <인연>이란 책을 읽으며 손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별 대단한 내용은 아니더라도 그 순간, 그때 떠오른 '그 마음'을 그 마음의 주인에게 전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쓰는 그 시간 동안, 그 글자들이 종이에 새겨지고 내 마음에 새겨진다. 그리고 그 편지가 전해지기 전 내 곁에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상대에게 전해지는 그 순간에도, 그리고 상대가 그 글자들을 읽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살아 생명력을 발휘한다.
이런 느린 속도감은 핸드폰 메시지나 컴퓨터의 빠른 속도감으로는 절대로 맛 볼 수 없는 생명력이다.
가끔은 이런 생명력이 그립다.
안녕,이라 말하면, 안녕,이라 답해 주는 소중한 사람이 돌아와
다시 나의 마음에도 '그리움', '보고 싶음'의 꽃이 되살아 났다.
다시 사람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우내 꽃이 피지 않고 땅 속에 있더라도 죽은 것이 아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땅 속에서 숨어 있는 씨앗은 꽃을 피우고 새싹을 피운다.
다시 그리움을 알고 보고 싶음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아직 봄이 되려면 멀었는데 벌써 그리움과 보고 싶음의 새싹이 꼼지락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