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Oct 17. 2020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고 마음에 든 부분을 워드화하고 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살아난 저자가 그 속에서 경험한 내용을 다룬 책이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그곳에서 찾아낸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안다면 살게 된다, 즉 인간에게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지,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매며 여러 책 속에서 답을 구했다. 삶의 의미는 결국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는 글도 읽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니 삶의 의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글을 읽으며 그 말에 수긍하며 나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책에, 삶의 의미에 대해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의 의견이 나왔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중략)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을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삶의 의미가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기 자신에게만 주어진,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에 책임을 짊으로써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삶의 의미는 포괄적으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으며 주어진 상황에 따라 한 개인이 갖고 있는 고유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동안 내가 생각한 삶의 의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생 전체를 통한 ‘단 하나의 의미’라고 한정지었다. 그리고 사유나 사색, 고민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었던 것은, 실존적 공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인생에서는 아무런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없던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며 며칠 동안 이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오늘 아침, 갑작스런 복통으로 아프신 아빠, 그리고 며칠 전 아빠가 보여준 미래에 대한 꿈, 계획을 들었던 날이 오버랩 된다. 늘 아버지 당신의 꿈이나 계획이 먼저고 그것들이 가족이나 자식보다는 자신을 위한 꿈이란 생각에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아파 누우신 아빠를 보며 일흔의 연세에도 여전히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그 자세가 아버지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는 걸 느낀다. 아빠 앞에서는 한없이 철없는 딸이다. 부끄럽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아마 끝나지 않은 듯하다. 앞으로도 나에게 주어진 삶의 임무를 다하며 그렇게 매번 나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나의 생의 종착역에서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다는 걸 결론지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존재만으로도 좋은 게 친구라는 친구의 새해 인사 메시지에, 올해는 전보다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갈 거라고 답문을 보냈다. 마음을 열고 날것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은 나에게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에 세 놓은 책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