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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스토너>와 <종이 여자> 그리고 <좋은 이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기욤 뮈소의 <종이 여자>, 그리고 김형경의 <좋은 이별>의 한 구절이 내 머릿속에서 서로 만났다.

<스토너>에서 주인공 스토너는 사(死)의 경계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자신의 삶에 대해 무엇을 '기대했는가'라고 묻는 그.

무엇을 '바라는가'가 아니었다.

그 책을 읽고 서평을 쓴 이후에도 '기대했는가'라는 그 질문이 나에게는 불편한 옷처럼 어색했다. 왜 '바라는가'라고 묻지 않았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사'의 경계에 있던 그였기에, 삶을 관조하고 돌아보고 있었기에 '기대했는가'라고 물었던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런 나의 의문은 그곳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또 다른 책. 기욤 뮈소의 <종이 여자>.

<종이 여자>라는 책의 한 페이지가, <스토너>의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 섣불렀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걸 하며 사는 게 인생이었다. 행운은 양념처럼 곁들여질 뿐, 나머지는 모두 운명이 주관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었다."


이런 말을 읖조리는 사람은 에셀이라는 여자다. 그녀는 마흔에 처음으로 아이를 가진다. 하지만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날짜를 채우지 못하고 출산하게 되고 아이는 태어난지 60초만에 죽고 만다.

60초 동안만 엄마였던 여자. 그녀의 독백은 이어진다. 그렇게 60초라는 초현실적인 시간을 겪은 후, 그녀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고. 그저 살아 있는 척할 뿐이었다고. 세상의 모든 빛, 기쁨, 믿음이 그 60초 동안 모두 말라버렸다고.

그녀가 삶에 던진 답이 바로 위의 문장이다.

인생은 바라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걸 하며 사는 것이라고.

오래 전에 읽은 김형경의 <좋은 이별>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생이 무의미해질 때, 그런 때조차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애도 작업의 일부이다. 인간뿐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길 때, 의혹을 품은 채 신에게 경배하는 일이 삶의 일부이다. 실패나 실연을 무릅쓰고 다시 미래를 꿈꾸는 것, 밥을 먹는 자신에 대한 역겨움을 참아내며 계속 먹는 일이 바로 용기이다."

얼마 전에 읽은 <스토너>의 마지막 문장, 어제 읽은 <종이 여자>의 한 페이지. 그리고 오래 전에 읽은 이 문장들이 이렇게 연결된다.

이 문장들이 말하는 것이 삶의 '정'답인지 아닌지 나는 아직 답을 내릴 수 없다. 

아마 나의 삶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나만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 답의 형상은 만들어지고 있음 또한 느껴진다.

그저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이라는 것. 그것 또한 느껴진다.

그리고 이 거부하고 싶은 답을 나 스스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어제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속의 파편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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