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다이어리 17
제목 그대로, 자꾸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멀어지는 삶이 있다는 걸 느낀다. 잘살기 위해서 뭐라도 하려고 하는 건데, 뭘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수렁에 깊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삶은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나아가는 숙명적 세계관 속에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잘 살아야겠다는 미션을 부여받게 되는데, 오히려 노력할수록 멀어지는 패러독스라니, 결국 삶은 함정인가?
지난 주부터 대학원 수업이 시작됐다. 오랜만에 다시 가는 학교라서 기분이 새롭다. 무작정 좋지만은 않다. 아니, 생각해보면 꼭 좋아야하는 것도 아니다. 돈만 내면 들어가기 어려운 것도 아닌데 들어갔다고 축하받을 것도 아니고,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다니는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말할 건가 싶기도 하다. 주변에 사람들도 반은 말리고 반은 응원해줬다. 그리고 대부분 속으로는 관심없었다는 걸 알고 있다. 나같아도 그럴 것이다. 그러던 말던, 남의 인생에 대부분은 나의 어쩌라고에 관통 당한다. 무관심이 아니라 관심 낭비를 피하기 위한 관심 차단에 가깝다. 그런 삶의 태도를 지닌 나에게, 오랜만에 돌아온 학교는 무척이나 많은 관심을 요구한다. 학사 행정, 시스템, 과제, 교과 과정 뿐만 아니라 학교 생활, 교우 관계 등등 무시할래야 무시하기 힘든 관심들이 여기저기 뻗쳐있다. 낯익어서 더 낯설다. 피하고 싶었고 피해왔다고 생각한 곳에 내가 스스로 결심하고 결정하고 결제해서 들어왔다. 함정은 누가 판걸까?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해야지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같이 일하는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거나 아쉽게 했을 때, 꼭 기분 나쁜 말을 해야하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른답게 행동한다’라는 것의 범주에 나는 꼭 들어가는 것 중에 하나가 배려와 예의라고 믿는다. 심지어 나는 폭력과 혐오는 그런 배려와 예의에 범주에도 들어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지 않고,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적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이 배려의 범위라고 들어가야한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이 무법지대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그걸 부정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있기도 하지만)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가해를 입히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일부러 기분 나쁘라고 꺼내는 말들도 폭력적이라고 느낀다. 잘못했으면 잘못됐다고 말하면 될 일이다. 실수를 했다면 실수하지 말라고 하면 되는 거다. 혹은 재발 방지를 요청하거나, 윗사람에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면 된다. 그런데 왜 기분나쁜 말을 굳이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걸까? 이건 결국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너머에 있다. 그런 상황에 생겼을 때 결국 나를 탓하게 되는 나, 나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버리고 마는 나, 이런 실망과 기만을 벗어나 도망가고 싶어지는 나, 그런 나때문이다. 잘하기 위해선 시간을 써야하지만 시간은 없고, 많이 하기 위해서 더 몰입해야하지만 도망가고 싶다. 이런 결정을 누가 내렸을까? 나는 과연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신화에 대한 책을 최근에 읽었다. 원래 ‘신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환상적인 존재, 초월적인 존재의 모습을 통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었고 그 이야기들에 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업 중에도 신화에 대한 수업도 듣게 되어 지난 주 첫수업을 들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나쁠 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더 좋았다. 신화에 대해서 배우는 건 늘 즐겁다. 신화에 대해서 배울 수록 어떤 의미에서 그것도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사피엔스가 다른 영장류와 다른 점은 ‘허구’를 만들고 그걸 공유할 수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현재는 그게 과학을 통해서 발견되고 증명되지만, 예전엔 이해할 수 없는 것, 초월적인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게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고 인정되면 이야기에서 전설로, 전설에서 신화로, 때로는 정치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종교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그럼 지금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이해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은? 결국 아직 오지 않는 내일에 대한 예상과 바로 타인에 대한 수용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바로 ‘나’ 자신이 있다.
잘하는 것도 잘 사는 것도 결국 내가 감당할 몫이다. 나는 나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나에 매몰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데미안을 떠올리다가 너무 상투적인 것 같아서 고개를 젓는다. 나는 오히려 스토너와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떠올리고, 박완서의 소설들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풍경화가들과 인상을 남기던 인상파들의 작품을 생각한다. 결국 나는 어떤 매개체로서 미디어이자 플랫폼이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깨닫는 순간, 그것을 이겨내려고 신에게 도전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가 사는 동안 나만의 프로메테우스가 된다. 시지프스가 된다. 이카로스가 된다.
떄로는 난 참 못난 인간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 한 켠이 편해진다. 다행인건 아직도 읽을 책이 많다. 먹을 걸 줄이고 읽는 걸 늘려야겠다. 조금 선선해졌으니 몸도 좀 더 움직여야겠다. 그냥 그렇게 살아야겠다. 타인의 못된 말에 나의 날을 소모하지 말아야지.
아, 맞다. 쓰다보니 생각났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가 떠올랐는데, 나를 좋게 만드는 어떤 것과 나쁘게 만드는 어떤 것이 분명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보사노바를 들으면 약간 행복해지는 느낌이 드는데, 힙합을 들으면 왠지 모르는 집념 같은 게 타오른다. (그런게 잘 없는데도 불구하고) 술은 날 나쁘게 만들고 물은 날 좋게 만든다. 잠은 나를 좋게 만들고 밤샘은 나를 나쁘게 만든다. 뭐 그런 식이다. 언젠가 그런 걸 한번 나열해놓고 좋은 것만 몰입하며 살아봐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잘 살아보겠다 뭘 한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