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눈사람 Jun 03. 2020

오이의 생.

어떤 결계를 통과한다는 것은.

잠결에.
호숫가에 담긴 달을 떠먹으니
밤이 으깨어졌다.
달은 모양이 점점 작아지다가
물속으로 발끝을 감추었다.
날이 밝아서
하늘을 호수에 욱여넣으려니
구름들은 미세하게 구부러지고 찌그러졌다.
균열이 생기고 찌그러진 하늘도
왠지 그럴싸해 보였다.
생이 비틀리는 경계를 지나온 것 같이
애를 쓰지 않은 듯 견디어냈다고.

그 밤.
냉동실에 얼어있던 오이를 꺼내 들고
잘게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다가 오이가 나를 잡아먹을지도 몰라.
소중한 표정으로 오이를 베어 먹던 너.
너에게서
도망쳐야겠어 어떻게든.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내달렸다.
어디로든 날 숨겨야겠어서.

검고 붉고 흰.



내가 바스라져 사라지는 중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화이트 비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