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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사람 Jan 26. 2021

눈밭에 남겨진 아이.

눈에 대한 처음 기억.

새하얀 눈을 보면 마음이 서늘해지는 이유가 있다고 너는 나와 친해지고 나서 한참을 뒤에야 운을 떼었다. 그건 네가 아직 사리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의 기억 때문이라고 했다. 손발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겨울의 중간쯤이라고 했었다. 1월쯤에. 네가 기억하는 것은 단편적이고 엄마가 이야기해준 것을 덧붙였다고 하면서.
그녀의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오랜 시간을 외롭게 살아오신 분이었다. 왜 엄마 곁에는 행복하고 다정스러운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인지 너는 속상해했다. 어쨌든 그 외로우신 외할머니의 어떤 겨울에 네가 찾아왔다. 실은 엄마는 너 외에도 아이들이 여럿이었고 외할머니의 적적함을 달래고 스스로 육아의 고단함을 덜기 위해 시골에 한 달간 너를 맡겨두었다고 한다.

하필 너여야만 했던 이유를 너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고 했는데 늘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했던 너라서 그래서.
그 지방은 해마다 겨울이 오면 눈이 많이 내려서 어른의 무릎 위로 쌓이는 곳이었다. 어린 너는 눈 뒤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을 날들이 계속되었다. 겨울이면 농사일이 바쁘지는 않아서 외할머니는 거의 대부분 집안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보내셨다. 어린 너를 곁에 두고는.
하지만 어느 날 이른 아침 방앗간에 가신다고 하며 자고 있는 어린 너를 두고 외출을 하셨다. 잠결에 할머니가 나가는 걸 알았지만 다시 잠이 들어 두 시간쯤 뒤에 깨어났을 때는 이미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외할머니를 기다리다가 티브이를 켜었을 때는 뉴스가 끝나가고 있고 곧 화면조정시간이 되었다. 텔레비전 안은 화면조정 고유의 줄 무늬색으로 바뀌고 삐 소리가 요란하게 적막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너는 괜히 무서워져서 방 안에서 나와 신발을 대충 꾀어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고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치워놓은 비좁은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눈이 부실만큼의 선명하고 고요한 흰색이었다. 너는 온 힘을 다해 울기 시작했다. 영원한 겨울만이 있는 눈의 세상에 혼자만 남겨진 것이 너무 쓸쓸하고 슬퍼져서 계속해서 울었다. 한참을 대문 앞에 서서 울다가는 걸어가며 또 울었다고 했다. 남의 집 대문 앞에 서서 대성통곡을 하는 사이 외할머니의 아주 먼 친척 할머니가 나오셔서 꼬마가 왜 여기서 울고 있느냐고 어린 너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너는 계속해서 울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뭐가 그리 서러운지 아주 오랜 시간을 울었다고 했는데 그날도 당연히 그랬다.
친척 할머니는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할 요령으로 손수 만든 한과를 내오셨다. 지금은 손이 많이 가고 귀해서 쉽게 먹지 못하는 전통음식이 그 시절에는 헤프고 또 어린아이에게는 낯설어서 울음을 달랠만한 효과를 보일 수 없었다고 했다. 너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 울었고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우는 소리를 짜내었다 한다. 너도 참 그렇게까지 울었다니 안쓰럽기도 하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너를 꽈악 안아주었다. 아기코끼리를 안아주는 느낌으로.

너는 울다가 지쳐 친척 할머니네 방 안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다. 정오가 지나고 나서야 외할머니는 눈을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뭉쳐서 만든 것 같은 경이로울 만큼 새하얗고 기다란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한 가래떡을 한대야 짊어지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최대한 서둘러서 돌아오셨다고 한다. 마루에 떡을 내려놓고 그제야 방안에 곤히 자고 있던 네가 없어진 걸 알고는 동네에 너를 찾아 나섰고 친척 할머니 옆에 잠들어 있던 너를 안고 돌아오셨다고.
너는 곧 잠이 깨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외할머니가 뽑아오신 방금 쌓인 눈을 닮은 떡을 맛나게 먹었다고 했다. 너는 그 후로 눈을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말에 어느새 나도 얼어붙어버렸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얼어붙은 내가 너를 달보드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너를 위해서라면 눈이 되고 달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기다란 눈이 그렇게 네 안에 가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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