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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사람 Jun 02. 2021

남산.

지독하게 한심하게 살 거야.

저녁과 새벽의 중간쯤에 여의도에서 용산을 향해 놓인 다리 위를 버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알아? 희한하게 그 순간 다리 위에는 내가 탄 버스를 제외하고는 아무 차량도 없어. 마치 우주에서 혼자가 된 기분이야. 버스는 제법 빠르고 조금은 덜컹거려야 해. 그 안에 같이 타고 있던 동지들은 실은 외계인이거나 고양이 인간이거나. 너랑 그 기분을 함께 느껴보고 싶어. 그건 아마 내가 한 번쯤 번지점프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하고 거대한 익룡의 발톱이 내 등을 움켜쥐고 날아가는 게 이런 기분일까. 우리의 일탈은 네온사인이 멀리 보이는 딱 그 시간 이어야만 했잖아. 모두들 내일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을 때 미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는 거 말이야. 비행 파충류가 날 N타워에 내려주었어. 난 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질릴 때까지 서울의 야경을 구경한 뒤에야 밑으로 내려왔지. 야경 같은 거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만.


백야가 오면 야경은 슬프게도 의미가 없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는 세계를 찾아 나서기로 약속해. 무의미한 일들이 꾸역꾸역 가득 차 있고 질서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아무렇게나 돌아가는 장소에. 거긴 시계의 긴 바늘과 짧은바늘이 바뀌어 있고 사람들은 시계를 보지 않아서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 회색 문을 찾아서 그걸 통과해야만 우리는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그 바깥으로. 아무도 가고 싶지 않고 가려하지 않는 무지로 시공간이 분열된 채로 한동안 떠돌게 될 거야. 이제 초대장을 보낼게. 답장은 필수가 아니지만 꼭 와줘야 해 꼭꼭.










야경을 바라보는 사치로움에 기댄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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