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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록도의 그녀>

함께 걷는 그림자

by 그림자

한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나에게 송두리째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한 시간이었다. 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봉사를 위해 소록도를 방문할 때였다.


슬픈 눈망울을 지닌 작은 사슴의 섬.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시킨 고독의 섬.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존재를 알게 되었던 그곳.


아름답게 손질된 정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빛과 봉사자들의 방문으로 분주해진 거리의 모습에서 소록도의 아픔과 슬픔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마주친 주민들은 언제나 미소로 인사해주었고, 나 또한 그분들에게 환한 미소로 답을 했다. 지난 역사에서 재앙으로 치부되던 한센병이 마치 실재하지 않는 허상처럼 느껴졌다. 도착하고 나서 사흘 동안, 낮에는 건물 내 외관을 청소하며 저녁에는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내가 그녀와 마주친 건, 떠나기 하루 전 마지막 행사를 앞두고 공원 벤치에 앉아 일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무늬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친 할머니가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 손가방을 뒤적이는 그녀의 뭉툭한 손마디에서 나는 한센병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손수건을 꺼낸 그녀는 연신 콧물을 훔치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강당에서 곧 있을 발표를 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와 나의 대화는 어느새 우리 주위에 잔잔하게 깔리는 밤의 기운처럼 조용하게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오빠와 함께 거리를 떠돌다가 한센병에 걸린 걸 알게 되었어. 사람들을 피해 쫓기고 쫓기다 오빠와 헤어지고 소록도에 들어왔지. 살은 썩어 들어가는데 일은 해야 하고, 이 손으로 돌멩이를 하나씩 들어다 옮겼지. 강당도, 저기 교회도, 공원도, 집도 다 우리들이 만든 거야. 예전엔 아무것도 없었어. 나무랑 잡초만 무성했지. 여길 보니까 어때 학생, 예쁘지?”


이곳에서 무언가를 해내었다는 성취감과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준다는 공감이 그녀의 눈빛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한데......”


그러나 뒤이은 그녀의 한마디는 섬의 낭만에 젖어있던 내 마음을 쿵하고 내려앉게 만들었다.


“힘들어. 너무 외롭고 힘들어.”


아직 어렸던 나는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녀와 눈만 맞추고 속절없이 흘러나오는 말을 듣기만 했다. 그녀를 위로해줄 따뜻한 말을 건네기에는 내가 살아온 삶은 한없이 가볍고 무지했다. 나에게 고생이라고 해봐야 당시에는 다음 학기 중간고사 걱정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난감해하며 마냥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다. 그런데 묵묵히 앉아 있던 내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녀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오빠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친척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어. 나는 남편도 아이도 없어. 아무도 없어. 이제 살날도 얼마나 남지 않았는데 여기 갇혀 사는 나이 많은 노인네한테 누가 관심을 갖겠어.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아. 그래서 학생이 참 고마워.”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을 본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을 거부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왠지 모를 뭉클함이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걸 느꼈다.


봉사자들이 모일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와 나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한센병 환우의 생활기라며 그녀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의 일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봉사로 지친 건지 그녀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며 듣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세상 사람 이야기는 어린 봉사자들에게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 모습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말 한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후, 당시에 내가 느낀 뭉클함은 단지 힘든 삶을 산 자에 대한 동정이었을까 하며 곰곰이 생각해보곤 했다. 내가 매일 누리고 있는 아주 소소한 관계들과 추억을 갖지 못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그러다 어릴 땐 할머니라 칭했던 그녀를 ‘그녀’라고 기억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할머니는 나에게 한 여자로 기억되어졌다.

누군가의 딸이자 여동생이었으나 아내이자 엄마가 될 수 없었던 그녀. 그녀의 마음속 별은 그리움과 한이 서려있었다. 세월 앞에서 응축된 그리움이 짙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낯선 이에게 이야기함으로써 그녀가 가진 원망의 한이 조금이나마 옅어지기를 바라며 섬을 나왔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소망한다. 이렇게 당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그러니 부디 다음 생에서는 외로워하지 말기를.


그녀는 만약 우리가 들판에 핀 한줄기 잡초 인생을 살지라도

우리의 삶은 모두 소중하다는 걸,

그리고 개인의 역사란 기억으로부터 잊혀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주웠다.


- 슬라이드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소록도에서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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