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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Oct 06. 2024

부정의 기억을 가진 채 삶을 구성하는 방법

 나의 첫 기억은 여섯 살 때 이사 온 강원도 원주에서부터 시작한다. 원주 베다니 유아원에 입학해 긴장이 가득한 시간을 기억한다. 유아원에 중심이 되는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를 중심으로 마당에서 뛰어놀면서 그 친구의 눈치를 봤었다. 어색한 마음을 담아 애쓰며 뛰었던 내 마음과 노력이 뚜렷하게 박혀 있다. 강원도 원주에 이사를 오기 전에는 인천에 살았다.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우리 형은 인천을 기억한다. 반면 나는 인천을 단편적으로만 기억하는데 좁고 길었던 집에서 큐빅을 끼우며 부업을 하던 엄마가 생각난다. 그리고 수의사로 닭 공장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우리들이 좋아하는 염통을 종종 가지고 오셔서 엄마가 염통으로 요리를 해주셨었다. 이 풍경들은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단지 그 순간의 풍경이 머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집의 모양은 인천 집 모양과 다를 것이다. 엄마가 하던 부업이 사실인지 아닌지, 인천에서 한 것인지 원주에서 한 것인지 청주에서 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부업을 하던 엄마와 닭 염통을 가지고 오던 아빠의 모습이 사진처럼 떠오를 뿐이다. 이 기억도 진짜 기억인지 커오면서 가족들과 대화를 하다 인위적으로 변조된 기억인지 확실하지 않다.

 반면 원주에서의 기억은 좀 더 선명하다. 베다니 유아원의 모습과 선생님의 얼굴, 나를 예뻐해 주던 선생님의 모습과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여섯 살 유아원 졸업식에서 엄마가 챙겨서 입었던 옷이 알고 보니 여섯 살 옷이 아니라 일곱 살의 옷이어서 다시 벗을 때의 망신스러웠던 부끄러움 감정이 떠오른다. 유아원에서 소풍을 갔던 날이 생각난다. 오줌이 너무 마려웠던 나는 선생님께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했고, 선생님은 나를 화장실에 데려가는 대신 들판 잔디에 소변을 누라고 했다. 선생님께 여기 말고 화장실에 가면 안 되냐 물어보았지만, 선생님은 괜찮다 했고, 결국 잔디에 소변을 누며 너무나 부끄럽고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불만이 가득했던 상황, 나를 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내가 유아원의 가장 화려한 날은 장기 자랑 발표회를 하는 날이었다. 여섯 살 발표회에서 나는 여자아이와 짝을 이루어 발레를 했고, 발레 도중 여자아이를 들어 올리는 동작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발표회 날 아이를 초등 올리다 떨어뜨렸다. 여자아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나를 원망하던 그 아이 엄마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위축된 나의 모습을 기억한다. 생각해 보면 아이를 떨어뜨린 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런 동작을 여섯 살 아이의 발표회에 넣은 선생님의 잘못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일곱 살의 발표회 때 나는 베다니 유아원의 주인공 시간이었던 꼬마 신랑, 꼬마 신부의 신랑 역을 맡았다. 그리고 오줌이 마려웠던 나는 엄마가 너무 꼭 묶어 놓은 한복의 끈을 풀지 못하고 팬티와 한복에 오줌을 누었다. 나의 부끄러움과 엄마를 원망하던 마음과 말들, 나를 달래주며 나와 같은 색의 한복을 입었던 친구 (원정재 라는 이름이었다.)와 한복을 바꿔 입고 발표회를 하던 시간을 기억한다. 정재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나를 보며 악의 없이 가끔 그날의 사건을 이야기했었다.

 어린 시절은 연속성으로 갖추어진 이미지나 인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몇 가지의 사건으로 대변된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주로 부끄러움과 나의 위축된 모습, 억울했던 마음과 후회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실제 나의 생활이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부모님이 찍어 놓은 사진을 보며 얼핏 추측할 뿐이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시절까지의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누가 나를 괴롭히면 금방 울었고 슬퍼했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잊지 못한 채 계속 후회를 했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반에서 다 같이 청소를 하는 날이 있었다. 청소를 열심히 하던 나는 반에 남자아이 하나가 청소를 하지 않고 손에 종이를 계속 만지작만지작 하는 걸 보며 속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도 청소를 하지 않는 그 아이를 보며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종이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며 "청소 좀 해!"라는 말을 했다. 그 아이는 나를 보며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식권을 왜 버려!" 하고 말했다. 그랬다. 그 친구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정부 지원의 식권을 받아 끼니를 때우던 아이였던 것이다.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모든 상황을 머리에 그리며 죄책감에 휩싸였지만 내 말은 마음과 달리 사과를 하지 못했다. 곧 내가 다시 뱉은 말은 "그러니까 청소를 제대로 했어야지!"였다. 그 남자아이와는 그날을 제외하고는 잘 지냈지만 나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흔이 된 지금도 그 친구의 "식권을 왜 버려!" 하던 목소리, 눈물이 맺힌 얼굴과 억울함과 화남이 뒤섞인 표정, 나를 바라보던 다른 아이들과 나의 행동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기억이라는 게 원래 부정적인 것이 주로 저장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나의 경우는 그랬다. 그리고 그 부정의 주체는 타인이 나를 힘들게 한 게 아니라, 내가 타인을 힘들게 한 상황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엄마가 모든 육아를 했다. 아버지는 타향인 원주에서 직장 생활에 전념하셨고 형과 나의 생활은 엄마의 돌봄으로 이루어졌다. 요즘이라면 무척 외로웠을 테지만 그때 우리가 살던 5층 아파트는 2층부터 4층까지 서로 알고 지냈다. 엄마가 없으면 2층에 있기도 했고, 4층 할머니께서 먹을 것을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토요일도 일을 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늘 일을 하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가끔 술을 드시고 오시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가 술을 마신 건 회사 일로 마셔야만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에게서도 강렬한 기억 하나가 있다. 내가 형과 내가 음악 테이프를 사달라고 계속 조르고 싸워 화가 난 아버지가 집에서 그 테이프를 부숴버린 적이 있다. 그 당시 아버지를 말리던 엄마의 표정과 형과 내가 울던 모습이 생각난다. 내가 조르던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의 시작점은 아버지가 테이프를 부수는 모습이고, 부순 것을 끝낸 뒤 기억은 종료된다. 이날을 제외하면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신 적은 없다. 아마 그날 사건을 기점으로 후회하며 반성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설영이가 자란 뒤 어떤 기억을 갖게 될까? 설영이도 분명 몇 가지의 사건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테이프 사건을 기억하는 것처럼 아마도 강렬한 부정의 감정이나 공포의 상황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린이집에 들어가 어색해 하는 모습과 친구들과 있을 때 민망하고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낸 사건처럼 가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설영이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부정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설영이도 언젠가 강렬한 나쁜 감정을 인지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 강렬한 기억의 대상이 아빠인 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어린 시절은 나쁜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 나는 원주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고 유아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걸 좋아했다. 다소 얌전하고 조용하며 소심했지만, 그 안에서도 늘 즐거운 일이 있었다. 이것은 사건으로 기억되는 게 아니다. 그 시절을 보내던 나의 정서가 가진 색이다. 그 색은 부정의 감정으로 쉬이 덮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사건의 기억도 역시 부정의 영역이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늘 따뜻했고 다정했다. 그날의 기억은 '오죽했으면 우리 아빠가 그랬을까'의 감정으로 남아 있다. 부정의 기억이 무조건 상처로 치환되는 건 아니다.

 설영이는 오늘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 설영이가 웃고 울고 기뻐했던 모든 시간은 단편적인 사건으로라도 담겨 있지 못한다. 오늘 설영이의 모습은 단지 아내와 나의 기억을 새로이 구성해 우리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더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역시 시간의 조각들은 설영이의 삶의 정서를 구성할 것이다. 요즘 부쩍이나 귀여워진 설영이는 분리 불안의 시절을 맞이해 엄마와 아빠, 외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낯설어한다. 그래서 나와 아내의 친구들을 만나면 멀리서 본인이 그 사람들을 관찰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면 어색해하며 운다. 그리고 요즘 설영이는 나와 아내가 앉아 있으면 저 멀리서 후다닥 기어 와 허벅지를 톡톡 치며 팔다리를 휘젓는다. 안아달라는 뜻이다. 그렇게 요즘 설영이는 부쩍 자라 본인의 의사로 안길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을 낯설어하는 시간을 보내는 설영이는 엄마와 아빠에게 안겨야 안심하고 두런두런 세상을 구경한다. 엄마와 아빠의 품이 있어야만 안정된 채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다. 아이가 오늘을 기억하는 건 사실 중요하지 않다. 커서 강렬한 부정의 기억을 잊지 못한 채 살아도 괜찮다. 부모를 통해 세상을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설영이가 가진 정서와 감각의 결은 기억이 생기기 전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억에 남는 부정의 사건들이 삶을 흔들지 못하게 한다. 사람은 그렇게 부정의 기억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부정의 사건이 부정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저 서로 사랑을 담아 잘 지내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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