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임신했을 때 가장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건 남편이 어디까지나 보조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임신한 아내의 남편은 출산 경험이 있는 모르는 사람보다 쓸모가 없었고 출산할 때도 나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기쁨만큼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반면 육아는 시간과 공을 들이는 만큼 결과가 있다. 육아는 정서적인 접근보다 신체적인 접근이 중요하다. 육아를 하는 부부가 서로 상처가 되는 말을 하는 건 몸이 힘들어서다. 정신적인 위기가 오는 이유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나 한 명에게 육아가 몰려서 불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도움이 주를 이루었던 임신과 출산에 비하면 육아의 영역은 명료하고 확실하다.
아이는 솔직하다. 육아를 할 때 얼굴을 자주 보여주고 자기를 많이 돌보았다면 그 사람을 신뢰하고 좋아한다. 만약 수유와 놀아주기, 목욕시키기, 기저귀 갈기, 아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이 돌보기 중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면 아이는 아빠를 보며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육아를 할 때 한 명이 계속 아이를 보고 한 명이 집안일을 다 처리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아이에게 아빠의 역할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수면 의식을 구성할 때 목욕시키기나 저녁 수유의 역할을 전담하게 해주면 좋다.
주말에 이틀 연속 설영이를 돌보았을 때랑 평일 퇴근 후 설영이의 반응이 사뭇 다르다. 아침 7시에 아빠를 보고 12시간이 지난 저녁 7시에 아빠를 만난 설영이는 그사이 약간 어색한 표정을 한다. 마치 '아빠 너무 반갑긴 한데 갑자기 와서 좀 당황했어.' 같은 느낌이랄까. 반면 주말에 설영이가 아빠를 보면 활짝 웃고 계속 안아달라고 안긴다. 물론 안아달라는 건 본인이 엄마 아빠와 붙어 있어야 안정이 되어서, 그리고 엄마와 아빠에게 붙어 있으면 모르는 곳을 구경할 수 있어서가 이유다. 주말에는 이유식도 내가 줄 때가 더 많다. 참새처럼 곧잘 밥을 받아먹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새끼 강아지 밥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가들은 좀 강아지 같다. 엄마와 아빠를 좋아하며 기어다니고 주는 대로 받아먹고 소리는 내지만 말은 못 하고, 만약 아가들에게 꼬리가 있다면 기분에 따라 꼬리를 요란하게 흔들었을 것이다. 설영이도 안다. 아빠가 계속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를, 아빠가 자기에게 해주는 것과 신뢰해야 하는지, 좋아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말이다. 이 사람에게 내 몸을 맡겨도 되는지, 이 사람이 내가 졸릴 때 해결을 해주는 사람인지, 이 사람이 내가 배고플 때 밥을 주는 사람인지, 나를 즐겁고 재밌게 해주는 사람인지를 안다. 설영이와 함께하는 주말은 그래서 소중하다. 물리적인 접촉과 설영이가 가진 욕구의 충족, 스킨십을 해주지 않는다면 설영이의 정서적인 영역에 내가 들어갈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고작 태어난 지 200일인 아이도 안다. 아빠가 말만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다.
내가 아직 200일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부모 중 열의 아홉은 육아보다 일을 하는 게 더 좋다고 한다. 지금의 나는 일보다 육아가 좋다. 일은 내가 물리적 노력과 정서적 노력을 같이 하더라도 잘 풀리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나의 애씀과 나의 일이 잘 되는 것은 일치되지 않는다. 사회복지사인 나의 직업은 육아에서도 직장에서도 사람을 돌보는 게 일이지만 직장에서의 돌봄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육아는 한 사람만 돌보면 되고, 나의 물리적 노력으로 해결이 되는 지점들이 꽤 있다.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성과가 보인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나의 이 생각은 설영이가 돌이 지나고 말을 하게 되면 달라질 수도 있다. 단지 시간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삶에서 늘 그래왔다. 원래 인생은 해결되지 않는 것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인생의 처음부터 관계를 쌓아갈 수 있다는 건 너무 행복하고 소중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육아가 좋고 기쁘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 동기와 대상이 나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아내, 그리고 설영이와 작은 블록을 하나 더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