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설영이를 임신한 시절에 주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받은 게 많았다. 각종 물품부터 옷, 장난감, 목욕용품을 비롯해 안전벨트로 고정하는 바구니 카시트와 유아차 겸용 카시트도 받았다. 처음에는 바구니 카시트에 설영이를 넣고 운전하거나 택시를 탔는데, 설영이가 겨울 아이이고, 조금 자란 후에는 아토피가 심해져 외출을 잘 하지 않다 보니 몇 번 쓰지 않았다. 유아차형 카시트는 처음에 유아차로 사용해 가끔 외출할 때 잘 사용했다. 그러다 아이가 공간이 좁은지 불편해해서 중고 거래로 10만 원에 절충형 유아차를 구매했다. 그렇게 유아차 겸용 카시트는 내 차에 고정되어 카시트로 사용되었다.
9월 즈음까지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온습도 조절이 중요한 아토피의 특성상 집에서 관리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추석이 지나고 슬슬 외출을 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디럭스와 휴대용의 중간인 절충형 유아차는 설영이가 불편해하지 않았고 탑승하기가 좋았지만, 우리 집이 빌라 2층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계단이 있고, 집에도, 복도에도 유아차를 조립해서 놔둘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렇게 절충형 유아차는 내 트렁크에 보관하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같이 설영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는 괜찮았다. 아내가 짐을 챙기고, 내가 설영이를 데리고 내려가 설영이를 카시트에 앉힌 뒤, 트렁크에서 유아차를 꺼내 조립하고, 다시 설영이를 카시트에서 꺼내 유아차에 앉히고 아내가 가지고 온 짐을 유아차 밑 짐칸에 놓았다. 익숙해지면서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혼자 외출할 때 유아차를 꺼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놓고 나온 짐이 있더라도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오는 건 둘째 치고 외출이 끝난 후 집에 들어가는 건 더욱 큰일이었다. 바깥에서 짐이 더 추가되는 날이면 아찔했다. 나는 어떻게 다 들고 간다고 하더라도 아내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기띠를 사용해 외출을 많이 했지만, 설영이가 8킬로를 넘어서며 아내에게는 그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가볍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유아차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유아차 겸용 카시트에도 사용의 한계를 느껴 함께 바꾸려고 찾아보았다.
카시트도, 휴대용 유아차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비쌌다. 휴대용 유아차는 아이가 다섯 살이 넘어서까지 타니, 절충형 유아차와 달리 소모품의 개념이라 중고로 하는 게 아니었다. 가볍고 접고 펴기 쉬운 걸로 찾다 보니 대부분 유아차의 금액이 50만 원부터 시작해 70~80만 원대까지 포진되어 있었다. 카시트도 비슷했다. 안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보니 종류도 많고 유럽에서 안전 인증을 받은 제품 - 아이사이즈 - 으로 구매해야 했다. 카시트도 연령별로 타는 게 따로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18kg이 될 때까지 타고, 그 이후에는 주니어 카시트로 바꾸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카시트는 60만 원부터 시작해 많이들 사용하는 안전하고 좋은 제품은 당연한 듯 100만 원이 넘어갔다. 숨이 막혔다.
임신과 육아를 하며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 많아졌다. 모아놓은 돈은 집 매매와 인테리어, 결혼을 하며 많이 소진했고 남은 돈은 임신과 육아에 들어갔다. 아껴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고, 대학원을 다니기 때문에 벌이를 위한 일을 하는 데 한계가 있는 아내와 사회복지사인 나의 급여로는 생활이 쉽지 않았다. 디딤돌 대출금을 높게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모아보면 매월 고정 지출이 꽤 많았다. 아이는 부쩍 자라고 자랄 때마다 필요한 것들이 생겼다. 소액이라면 다른 것들을 조절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카시트와 휴대용 유아차가 동시에 필요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간이 더 지나면 아내의 대학원 생활과 그 이후의 미래를 그리기 위해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나는 늘 서울의 아쉬운 점이 세대별, 사람의 종류별로 분절된 생활이 만들어지는 것을 꼽았다. 나이와 성향별로 다니는 동네가 따로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지냈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설영이가 좀 더 자연 친화적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다양한 생각을 스스로 키워가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나와 아내가 가고 싶은 어린이집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이었다. 그 어린이집은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교사와 아이의 비율이 낮다 보니 이런저런 추가 비용이 들었다. 어린이집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추가로 지출되는 비용이 부담되는 건 사실이었다.
육아를 하며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돈, 즉 경제적인 영역이다. 아이에게 마음을 다하는 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육체적으로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보고 아이를 사랑하는 건 자신 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방향을 잡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글에도 쓴 것처럼 아이의 가치관과 아내와 내 삶의 가치관을 위해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며 설영이를 키워갔지만 내 마음에도, 글에도 솔직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가장 큰 고민을 외면한 채 살아갔다. 하지만 가계부의 수입과 지출을 들여다보고 계산하고, 잔여 현금을 따져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고민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보 멍청이같이 친구들에게도 돈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많이 했다. 가장 어려운 건 언제 어느 지출이 얼마큼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의 혼자 생활을 꾸리거나 성인과 성인이 함께 부부가 된 다음이라면 필요한 지출을 계산하고 조절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자라는 아이에게 언제 얼마큼 어떤 돈이 들어갈지는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유아차와 카시트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을 따지다 보면 들어가는 비용이 생각보다 컸다. 예를 들어 설영이의 아토피 치료에 사용되는 치료비나 크림을 아낄 수는 없고, 안전과 직결된 대목, 건강이 악화되는 대목, 그리고 아이의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우리 부부의 육아 가치관에 들어맞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것에도 기준점이 들어갔다. 보기 좋은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삶, 그리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여름철 전기 요금만 해도 매월 십몇만 원씩 들어갔다. 사실 생각보다, 또는 기준점보다 비싼 게 아니다. 물가 대비 나의 급여가 낮은 게 내가 어려운 이유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부족하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당장 현금이 부족하거나 생활비에 필요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도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받은 적도 없고, 집에 빚이 쌓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2002년에 서울에 집을 매매해 올라오셨고,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벌어왔고 엄마는 알뜰하고 현명하게 살림하고 돈을 관리했다. 나도 낭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고 난 후 집을 매매하기 전까지 한 달에 100만 원 이하의 저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대출금도 월 저축액의 70% 정도로 설정했다. 특정하게 돈이 들어가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렵지 않을 정도의 금액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나는 지금처럼 현금 보유량이 부족할 정도의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나는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거나 신용 대출을 받지 않았다. 적지만 한 달에 일정 금액이 들어가는 적금과 주택청약이 남아 있다. 유아차와 카시트를 구매하고,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일정 금액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게 당황스러웠다. 이것도 사실 2011년 12월에 출고된 내 차를 몇 년 후에는 바꿔야 할 것 같아 가능한 돈을 모아놓고 싶기 때문이다.
급여가 부족하다. 한 달에 들어오는 수입이 부족하다. 미지의 영역인 설영이가 자란 이후의 삶을 대비해야 하는데, 나와 아내의 마음 준비와 달리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영역에 대한 대비가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럴 때는 늘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을 하며 그 또한 '어떻게든 되어왔다.' 하지만 나의 능력을 벗어나 어떻게 되지 않는 상황을 가장이 된 채로 느껴보니 너무 불안하고 속이 상한다. 몇 년이 지나 아내의 대학원 생활이 어느 정도 정돈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불안감에 의해 확신을 잃는다. 내가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나의 아내와 내 딸이 어떻게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다. 잘해보고 싶다. 정말 잘해보고 싶다.
얼마 전에는 전화기의 액정이 깨져 50만 원이 들었고, 설영이의 휴대용 유아차에 55만 원, 카시트에 65만 원이 들었다. 액정은 엄마가 바꿔주었고 유아차와 카시트는 형이 선물해 줬다. 엄마한테도 형한테도 내가 가족들 돈 뜯어가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니, 나는 나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다. 똑바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