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많이 배우고 입력받고 강요받는 건,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행이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가의 필수 조직인 군대가 조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명하복에 따른 위계질서가 필수적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국회에 무장한 군인이 깔려 시민을 향해 위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보며 낯익은 공포감을 느낀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반복된 계엄령과 무장한 군인의 위력 행사는 그 행위를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더라도 기록과 구전, 그리고 학습을 통해 학습된 공포가 유전된다. 익숙한 시작과 익숙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 현실을 보며 "민주당의 폭주를 알리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박완서는 물론 이청준과 최인훈 등 수많은 작가들이 한국전쟁과 그 이후를 배경으로 문학을 만들었다. 그 시대에 전후 문학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많은 사람이 읽었던 건 시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와 참상을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도 배운다. 이는 학교에서 전쟁에 대해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문학은 독자에게 시대를 체험시켜 주고, 작가가 겪은 비극과 괴로움, 극복하지 못한 고통을 알게 해준다. 이는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공감이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 이후의 세대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애를 썼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대다수의 문학이 그렇지만 때문에 한국 문학에도 수많은 절망이 등장한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한국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점은 그 시대와 현재의 시대를 연결해 잇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다. 과거가 과거로 존재하지 않은 채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통해 광주의 사건을 현재로 이어갔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었지만, 문학을 통해 한국은 시대를 잊지 않고 깨달음을 이어가며, 상흔을 잊지 않는다. 망각은 인간에게 있어 축복이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절망이다. 우리에게는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게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의 계엄령 선포는 영세부터 백 세의 노인에게까지 과거의 상흔을 되살려 유전되어 각인된 공포를 끌어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분절된 대한민국의 모든 세대를 하나로 연결하게 했다. 습관적으로 "지금이 2024년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말이 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는 틀린 말이었다. 시간이 흐른다고 시대가 저절로 함께 바뀌는 게 아니었다. 시간은 단지 시간일 뿐, 망각은 시대를 바꾸지 못하고 과거의 시대를 현재로 가져오게 한다. 오늘,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시대를 시간이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시대는 공포감을 느낀 채 움직이고 활동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직접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이 망각되지 못한 채 유전된 공포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개인에게 주어진 공포는 몸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집단에 주어진 공포는 반발의 도화선이 된다. 이제 시대가 움직인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직인 군대의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학습된 공포감은 최종 지휘관의 지시를 선뜻 따르지 못하게 한다. 동의가 선행되지 못한 채 시행되는 물리력의 결말이 어떠한지 이미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계엄령은 세 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계엄령이 실패로 끝난 후 "수고했다. 중과부적이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말이다. 적은 수였다는 것은 움직임이 적었다는 뜻이다. 이 시도가 처음이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상명하복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에는 학습된 공포감이 시대를 그때와 달리 바꾸어 놓았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공포심을 갖지 않는다. 시대는 항명한다. 2024년 12월 3일 23:00 선포되어 12월 4일 04:30 종료된 계엄령은 시대의 과거 회귀에 대한 가능성에 따른 새로운 공포를 모든 이에게 심었다. 그리고 망각 없는 새로운 항명의 시대가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