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책 전작 주의를 하고 있다. 이미 읽었던 책이 몇 권 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아 다시 읽으니 또 그것대로 새롭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에는 한강 작가의 책을 연속으로 읽으면 너무 우울하고 감정이 가라앉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연속으로 읽으니 한강 작가의 비폭력주의와 식물화(植物化)가 더 눈에 띈다. 우울하고 마음이 가라앉기보다, 한강 작가는 시작점에서부터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오롯이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 작가의 소설을 전체가 하나의 글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분절되어 있지만 사실은 연속적인,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한강을 그대로 나타내는 글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단 하나 다른 결을 가진 책이 있다면, 그것은 <소년이 온다>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절규한다. 피가 나는 목소리로 내뱉는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여기 폭력이 있다고, 여기를 모두 바라봐야만 한다고 말한다.
2024년 12월 3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2016년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2016년의 기분은 황당무계함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황당함과 이 시대가 보여주는 허무함, 무력감에 이어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비롯된 환희도 있었다. 같은 정의를 생각하고 행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2014년 12월 3일 밤, 미리 잠든 우리 가족은 계엄령의 발동을 모르고 다음 날 아침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던 그날, 진짜 공포와 두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단 한 명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의 공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우리의 안전한 삶은 계엄령 포고문의 언어 그대로 처단되었다. 어렵게 쌓은 세상은 그렇게 궤멸했다.
그리고 2024년 12월 7일 밤, 완전한 이기심을 목도했다. 커다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악독한 마음을 먹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았다. 모두의 안전은 그대로 사라졌고, 불안감과 공포에 이어 분노와 허망함이 추가되었다. 아직 한 살이 채 되지 않은 우리 딸에게 2024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희망과 애정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때로는 분노가 휘몰아쳐 누군가를 저주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늘 다시 돌아오려 애썼다. 나에게도 악한 마음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가장 우선시한다는 말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마음을 건드린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안위를 챙기니 나 또한 나의 안위를 챙기면 된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의 안위'는 폭력을 불러온다. 정부를 자신이라 상정한 채 모든 국민을 직접적인 수렁으로 몰아넣으려는 계획 실행하려 한 윤석열은 물론, 탄핵 투표를 거부한 국민의 힘 또한 그렇고, 이참에 자신의 기회를 더 넓히고자 헌법을 어기겠다 당당히 선포한 한덕수와 한동훈 또한 그렇다. 이 모든 안위가 현재의 절망을 만들었다.
아이의 탄생은 자신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을 만들어낸다. 그렇다고 아이가 나의 힘듦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의 아이'는 힘듦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부모는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아이를 위함'은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나 자신을 떼어내 아이에게 주어 아이에게 자기가 겪은 불행을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이가 살아가기에 괜찮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부모라면 누구나 그 두 가지를 모두 고민하며 살아간다. 이 두 가지 행위의 목적은 사실 하나다. 나의 아이가 불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가족이 커다란 하나의 동일한 가치관을 공유한 채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족 구성원 모두를 희생시키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부모는 내 아이의 행복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아이의 안위'를 보위하기 위해 어느 부모는 타인의 안위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 부모는 자신의 행동이 아이가 살아가기에 괜찮은 세상을 구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세상에 태어난다.
12월 3일의 일을 벌인 윤석열도, 12월 7일의 일을 벌인 국민의힘과 추경호, 김용현, 이상민, 한덕수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다. 더 멀리 가서 1980년 광주에서 끔찍한 일을 벌인 전두환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나 한 명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작게는 내가 속한 가족과 집단, 크게는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를 위해 타인을 처단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고, 나도 괴롭고 힘들다고, 이것은 바로 사건을 저지른 나 자신의 트라우마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폭력은 바로 거기에서 태어난다. 나를 보호하는 일이 확대될 때, 그리고 나의 소중한 존재를 보호하기 위한 시도가 잘못될 때 탄생한다. 한강 작가의 식물화는 그에 따른 필연적인 움직임이다. 나는 그 누구도 파괴하고 싶지 않지만, 불가능하다. 나에게 남은 방법은 그저 하나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 식물은 세상의 폭력을 흡수하고 견딘다. 따라서 식물화(植物化)는 도피와는 다르다. 나의 안위와 내가 사랑하는 존재의 안위, 타자의 안위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폭력에 대한 주체적인 상징이자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식물이 되기에는 나는 너무 멀고 험하다. 나는 유약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상냥하고 때로는 이기적이다. 나의 폭력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폭력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소리를 지르고 뱉어야 한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여기 폭력이 있다고, 모두 여기를 바라보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