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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Dec 01. 2024

개인의 삶, 부부의 삶, 아이가 있는 삶

 결혼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혼자 살기 위해 마련한 망원동의 14평짜리 빌라의 식구가 세 명이 된 지 여덟 달이 지났다. 내가 결혼 전 무엇보다 신경 쓴 건 결혼식이나 사진 촬영 같은 게 아니라 집의 리모델링이었다. 그렇게 집 전체 리모델링을 진행하고 짙은 우드 색을 기반으로 우유색을 섞어 마무리한 인테리어는 원목과 나무가 많았던 나의 가구들과 잘 어울렸다. 집을 소개하는 유튜브에 출연하기도 했다. 서재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던 대형 테이블은 지금 거실 구석으로 밀려나 아내와 나의 식사, 그리고 나의 독서와 작업대로 사용되고 있다. 집에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며 호기롭게 만든 서재의 아치형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집의 가장 중요한 곳이었지만 설영이의 놀이방이 된 지금 공간을 분리하기 어려운 원인이 되었다. 지금 아치형 문틀 아래에는 설영이가 나가지 못하도록 안전문이 설치되어 있다.

 아이의 짐은 성인의 짐보다 더 많고 시기에 따라 자주 바뀐다. 결혼 후 인테리어를 할 때 우리는 우리 부부가 어떻게 짐을 놓고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의논을 많이 했고 그에 따라 집을 구성했다. 아이가 함께 살아갈 집을 만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인테리어를 해준 아내의 지인이 오히려 아이가 태어난 이후를 생각하며 집을 디자인해 주었다. 가장 많은 아이의 짐부터 우리의 짐까지 즐비한 집이 비좁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짐을 비우고 잘 살아갈까? 나는 미니멀리스트와는 거리가 멀어서 필요할 때 필요한 물건이 바로 있어야 한다. 사실 절대적인 공간이 부족하지는 않다. 설영이가 사용할 큰 장난감은 장난감 대여소에서 빌려오기를 반복하고 이런저런 도구들이 있지만 놀기에도 공간이 충분하다. 분리 수면을 하지 않는 우리는 침실에서 셋이 같이 잠을 자고, 거실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원활하기 위해서는 집을 테트리스 하듯 공간을 잘 짜야 한다. 집이 좀 더 넓었다면 대충 놓았을 것 같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가구와 물건을 배치할 때 하나하나 깊이 고민하게 된다. 최근에도 자는 공간을 제대로 마련하기 위해 저상 침대로 사용하던 프레임을 버리고 토퍼와 설영이의 침구를 놓는 형태로 잠자리를 바꾸었고 가구도 몇 개를 다른 곳으로 옮겨 거실의 공간을 넓혔다. 좁은 집에 살면 창의성이 좋아진다더니 우리가 그런 격이다. 정리 정돈도 항상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넘쳐나는 짐들에 머리까지 복잡해진다.

 이번 추석 때는 처음으로 설영이를 데리고 양가에 갔다. 새삼 집들이 넓어 보였다. 본가에 가서 자연스럽게 "설영아, 여기는 거실이 넓으니까 편하게 다녀봐"라는 말을 했다. 우리 집이 좁다는 말은 자주 했지만, 막상 넓은 집에 가서 보니 기분이 좀 달랐다. 어디에 있어도 부딪힐 일이 없어 보이는 곳을 아이가 다니고, 큰 장난감이 여러 개 있어도 무방할 것 같은 곳을 기어다니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잘못한 것도 없이 잘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함과 불만은 상대적이라고, 나의 거의 모든 것을 넣은 망원동 우리 집이 아쉽게 느껴졌다. 비교하지 않으면서 살자는 말은 원론적으로 너무 옳은 말이지만 혼자 살았을 때는 비교할 일이 없었던 나의 삶이 지금은 비교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졌다. 유아차 하나를 사더라도 편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은 가격이 비싸고, 아이가 밥을 먹는 의자조차도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나는 아이 의자가 그렇게 비쌀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내는 많은 물건을 중고 거래로 팔고, 또 산다. 중고 거래 앱이 없었다면 아이를 키우는 데도 더 큰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급여도 너무 부족하게 느껴지고 집도 너무 좁게 느껴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미래를 잘 버텨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나의 정신 건강이 나빠지는 게 느껴졌다. 혼자 살 때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 지금은 그때와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그건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능력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초조함이다. 내가 참는 건 괜찮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참아야 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라 느껴진다. 그리고 나의 능력으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도 나를 힘들게 한다. 혼자 살면 예상 밖의 변수가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 정해진 삶의 루틴이 있고, 지출의 종류와 금액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나의 선호와 주된 지출 등을 이미 알고 있고 그 외의 일들은 대비를 위한 저축이나 보험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다는 건 전혀 알 수 없는 변수들이 지속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둘째라면 다르겠지만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사람들은 정말 아예 알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거나 정보를 찾아봐도 가정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 또한 알 수 없다. 나 또한 내가 생각한 기준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통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우리나라는 결혼 연령이 늦은 편이고 나는 서른아홉 살에 결혼했다. 그 나이가 되면 이미 본인의 삶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규정되어 있다. 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 같은 것들이 생긴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그 기준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부부 각자의 성향에 따라 삶의 모습이 합의점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부부에게는 각자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즉 다시 말해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아이가 크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단지 육아를 보조하는 아빠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 와중에 내가 매매한 망원동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음과 동시에 넓은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급여는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좀 더 일찍 만나 함께 세상을 구성했다면 지금과는 좀 더 달랐을까? 개인이 가진 욕심을 모른 채 가정을 잘 꾸리는 것을 목표로 지내거나, 엄청나게 싸우며 힘들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에게 집이라는 건 내가 가진 욕심의 뚜렷한 상징일 뿐이다.

 아직 육아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나에게는 개인의 삶과 부부의 삶, 아이가 함께 있는 삶 세 가지가 공존한다. 이 공존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져야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가진 것을 토대로 맞추어 산다는 말은 쉽지만, 너무도 어렵다. 아직 내가 무엇을 갖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하루하루와 일주일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낼 뿐이다. 어쨌든 내가 혼란스러운 채로 아빠의 시간을 오래 보낸다면 설영이도 혼란스러운 삶을 갖게 될 것이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해결해 주지만  사실 시간은 사람을 압박해 해결을 강요한다. 해결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지났을 때 다가올 상황의 예측은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에서 중요한 건 귀여운 우리 딸과 아내와 불안정한 변수 없이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답이 무엇이지는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 욕심을 정리하는데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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