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상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훈 Apr 07. 2016

사랑에 대한 담론

2015.03.11


  사랑은 찌질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이 보낼수록 자신이 덜 찌질 해지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에 관심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느끼는 초조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진정이 된다면 그 사람의 뜻하지 않은 행동도 나와 상관이 없어진다. 이것도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항상 같기를 바라는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해서 싸움을 일으키게 될까?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모두에게 자랑스럽기를 바라며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의 애인은 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재산 중 하나니까, '나의 것' 이 아니라면 그것이 부끄럽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가 소유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애인의 정의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상대도 당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행동을 하거나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최소한 그것이 당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존중하지 않고 당신의 판단에 나를 바꾸려고 할 때 상대방은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연애를 하면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생기는데, 문제는 기대의 모양이나 방식, 색과 맛이 모두 다르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애인은 나를 사랑하니까 당연히 내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나의 기대를 당연히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기대의 모양을 완벽히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표현을 하더라도 상황에 맞게 이해하기도 어렵고, 이해하더라도 행동하기는 더 어렵다. 왜냐면 나와 맞지 않는 곳이니 동작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상황이 반복되면 위의 문단과 같이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대에 억지로 나를 끼워 넣으려고 하는 애인에게 항변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상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수록 연애는 안정적으로 변한다. 연애를 하더라도 상대와 나를 분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더라도 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가 된다면 상대의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와 나를 고려해서 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존중의 또 다른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나 겪는 이 존중의 시기가 권태라고 느껴질 때 헤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안정과 권태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거다. 인정과 권태 중 어떠한 것을 누가 먼저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둘의 연애 속도와 헤어짐의 시기와 기간이 모두 달라진다.


  내가 가진 기대의 모양에 상대방을 끼워 넣지 않고 서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랑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성숙한 사랑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어떻게 놓으라는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