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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Sep 10. 2016

익숙하지만 새로운 사실

2016.01.20


  요즘 천식이 심해졌다. 감기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가만히 있어도 천명이 들리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겨도 영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지난번 병원에 가서 먹고 남은 약 이틀 분을 털어먹는데도 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이 약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지난 진료에서 받았던 3차 병원 진료 의뢰서를 꺼내 병원에 전화를 했다.


  정확히 12월의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감기에 걸려 천식이 심해져 평소처럼 가던 내과에 약을 받으려 했으나 호흡기 내과 진료를 받은 게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다른 곳에 가서 약을 좀 받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교대역 근처의 호흡기 내과를 찾았다. 그리고 이내 진료를 받으며 의사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나는 소아천식 환자였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언제 천식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럴 정도로 어릴 때부터 천식이 있었고, 책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쌕쌕거릴 때 뿌리는 호흡기, 그것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나의 호흡기(=벤톨린)의 의존도는 매우 커서, 그 약이 없으면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할 정도가 된다. 학창시절에도 달리기는 하지 못했고, 안 그래도 운동신경이 없던 나에게 천식은 쥐약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오래달리기라도 하게 되면 항상 거의 마지막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들어온 이후에도 숨을 고르고, 안정된 호흡을 찾는 데에도 많은 약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운동 외 다른 부분으로 자존감을 높이고 관계를 형성할 방법이 필요했고 지금과 같은 나의 성향이 만들어진 데에 천식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식으로 3급을 받았고, 21살에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천식으로 군대에서 꽤 많은 고생을 했다. 다리라도 부러지면 티라도 날 것을, 21~25살의 남성 집단에서 천식은 많은 부대원들에게 꾀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훈련을 잘 받지 못했고, 그렇지 않아도 훈련이 많은 부대에서 나 같은 훈련 열외자의 존재는 다른 소대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나를 거슬려 했던 나의 한 달~세 달 고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괴롭혔고 나는 보고할 곳이 없었다. 제대를 앞둔 나의 분대장에게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등병은 귀찮은 존재였고, 우리 소대장은 가장 앞장서서 나를 꾀병 부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심지어 그 사람은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왕따를 당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자 나는 어디에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고 그렇게만 살 수 없었던 나는 현실을 이겨보고자 노력해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열심히 뛰면 "저거 봐 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거잖아" 라는 시선을 받았다는 거다. 하지만 노력을 하면 할수록 천식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렇게 나는 각 한 달씩, 총 두 번 군병원에 입원했다. 차라리 다른 부대에 전출이라도 보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는 되지 못 했다. 군 생활 동안 포상휴가 한번 받은 적이 없었고, 겨우 받은 포상휴가도 나를 괴롭히던 고참에게 빼앗겼지만 퇴원 후 작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노력 끝에 일부 나를 지지해주는 소대원들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소대원들은 존재했고, 그들도 천식도 마치 삶의 낙인듯 나를 괴롭혔다. 


  군 생활과 치료의 부작용으로 얻게 된 수전증과 함께 천식의 그림자에 익숙해질 때 즈음 나는 자주 아팠고, 한밤중 응급실에도 여러 번 가게 되었다. 내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진료를 받고 심지어 맹장까지 제거하고 난 후 CT를 찍어 알게 된 병명은 생식세포종이라는 악성종양이었고, 나는 3기 진단을 받았다. 일 년여 여섯 차례의 항암치료와 투병 끝에 치료를 마치게 되었고 정말 많은 것을 잃고, 많은 것을 얻은 시간과 함께 나는 질환이나 신체적 고통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천식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앓아왔기 때문에 이미 나는 병원에 가서 의사와 약의 종류를 상의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렇게 아픈데 이약 주시고 이약은 안 주셔도 될 것 같아요" 따위의 대화를 의사와 나누었다. 


  지난번에 간 병원에서도 당연히 이러한 루틴의 대화를 나누려고 했는데, 의외로 "왜 그렇게 몸에 신경을 안 써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의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왜 몸에 신경을 써야 하지?"라는 생각이 사실 먼저 들었는데, 차마 그렇게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러게요, 하하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사는 진심으로 나의 질환을 걱정해주었다. 치료를 하기 위한 방법의 제시보다 진심 어린 걱정이 나에게 먼저 닿았고 나는 몸에도 신경을 써야 된다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서울성모병원에 전화를 한 당일 오후 비어있는 진료 타임이 하나 있었고 그날 오후 바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내가 너무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는지, 약간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새로 폐기능 검사와 천식 검사를 하고 혈액검사와 엑스레이를 찍은 후 수납을 했는데, 총 진료비가 23만 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돈이 정말 진짜 너무 아까웠다. 차라리 다른 같은 가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옷을 사서 나누어 주었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았을 텐데... 나는 돈이라는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치료에 드는 돈이 가장 아깝다.


  마찬가지로 일 년에 한 번씩 찍는 CT 금액을 여전히 나는 아까워한다. 나의 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사실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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