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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훈 Jan 18. 201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2017.01.18


니체는 영원회귀를 말하며 인간이 하는 행위들에 무거운 짐을 얹었다.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 앞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무거워진다. 반면 우리의 삶은 가벼움 속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원하고 그 이미지는 생명을 띈 채로 진실하고 무겁게 안착한다. 인간에게 짐이 없다면 너무나 가벼워진 인간은 가볍게 날아가 버려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거움이 좋고 가벼움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모순은 미묘한 모양을 띈 채로 우리 곁에 머물러있다. 

토마시는 독감에 걸린 테레자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생명의 무거움을 느꼈으며 그 진실함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무거운 진실을 거부하며 테레자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을 읽었다. 이혼 후 가벼운 관계만을 가지며 책임 없는 삶이 자신을 표현하는 생이라 생각했던 토마시에게 이 혼란스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토마시에게 여자란 세상을 알아가는 방법이다. 인간은 알아갈수록 모두 똑같고 비슷한 점이 많으며 그중 상이한 부분을 알기 위해서 토마시는 섹스를 한다. 다만 다른 여자들과 테레자의 다른 점은 테레자에게 생긴 열병으로 인해 토마시가 그녀를 바구니에 넣어진 아이라고 생각해 집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 그 하나다. 토마시의 사랑의 시작은 시적 기억 속에 들어간 테레자의 모습 때문이었다. 

한국어로 잠을 잔다는 것은 정말 잠을 자는 것과 정사,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토마시에게 잠이란 여러 여자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욕망과 같은 곳에 누워 잠을 자고 싶은 특별하고도 무거운 욕망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자기와만 잠을 자고 정사를 하기를 바라는 테레자와 함께 있게 되면서 토마시 또한 같은 욕망을 느끼고 사랑으로 무게감을 더해간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토마시는 단순한 욕망과 즐거움의 해결을 위한 타인과의 정사를 포기할 수 없었고 마약과 같이 후회하면서도 그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토마시는 상반된 욕망을 가진 채로 생활하게 된다. 

테레자는 체코에 있었던 '프라하의 봄'을 겪으며 괴로워하고 토마시는 원하지 않았던 체코를 떠나 스위스 망명을 실시하지만 스위스에서의 시간 동안 자신이 온전하게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토마시를 떠난다. 토마시는 스스로 느끼던 모순처럼 테레자의 떠남에 대해 가벼움을 느꼈지만 그 가벼움을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여자들과의 정사를 통한 가벼움은 테레자와의 관계를 통한 무거움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만난 토마시와 테레자는 자신들의 만남이 우연에 근거한 아주 가벼운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 진중하고 모두 진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사랑은 그렇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얼마든지 가벼울 수 있다. 

테레자의 어머니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중요시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악하게 만든 사람들을 증오하며 동시에 젊은 테레자를 질투했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테레자의 어머니는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과거를 버림과 동시에 테레자를 끌고 들어가고자 했다. 어머니를 닮은 테레자는 그를 벗어나고 싶어 했고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발산했다. 그러던 와중에 과거와 단절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토마시였다. 그녀는 사실 토마시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을 꺼내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관계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사랑이란 이처럼 스스로에게는 충분히 무겁지만 한없이 가볍다. 이처럼 테레자와 토마시의 관계는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분명한 타이밍과 특별한 힘이 필요하다. 이는 분명 가볍지 않다. 평생을 찾아다녀 이미 운명이 된 토마시가 테레자에게는 그 누구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벗어나기를 한없이 갈망했고 스스로의 생명을 찾기를 바라왔다. 

토마시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테레자가 읽는 책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다. 안나 카레리나는 사랑을 찾아 떠나는 생을 가진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안나 카레리나처럼 스스로 인생을 찾아 선택하고 싶어 했으며 동시에 안나 카레리나의 남편, 불행한 '카레닌'의 삶에 자신을 동조한다. 그래서 테레자는 키우는 개의 이름을 '카레닌'이라 짓는다. 

테레자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동시에 모두와 다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토마시의 바람기와 어머니의 애원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무력함과 추락의 욕구 속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토마시의 이러한 테레자의 추락에의 갈망을 해결해주어야만 했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서로 둘 사이 단 하나의 존재로 자리매김했지만 둘의 표현은 전혀 달랐다. 토마시는 진중함으로서의 테레자의 존재가 필요했고 그 진중함은 다른 여자들과의 가벼움을 위해 있어야만 했다. 반면 테레자는 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마시의 존재가 필요했으며 이는 우연으로 점철되었지만 분명한 운명의 모양을 띄고 있으며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단 하나의 존재여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테레자는 시대착오적이고 둔감하다. 그녀가 그녀로서 존재할 때는 오직 '프라하의 봄'의 사진을 찍을 때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은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보도로서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은 변해버렸고 지나간 프라하의 봄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흘러가고 결정지어진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커다란 무거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렇듯 가벼워질 수 있다. 그녀는 사진작가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토마시로 존재하며, 토마시를 위하는 삶이다. 프라하의 봄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삶도 무엇보다 가볍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한편 사비나와 프란츠는 서로 충분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나 둘 사이는 논리적 이야기를 제외한 의미를 가진 흐름의 강물을 타지 못 했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그러한 모티브를 프란츠는 읽을 수 없었고 너무나 성숙한 채로 만난 그들은 각자가 가진 모티브를 통해 상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모든 사이가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있지는 않다. 사랑은 이해가 아닌 필요로서 주어질 수 있고 그 필요만 채워진다면 관계는 얼마든지 성립된다. 프란츠는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여자란 숭고하고도 강인한 모습을 지닌, 고통에 대응하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띈 사람이어야만 했다. 반면 사비나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의 고난과 선택에 대한 배신에 또다시 배신을 하는 삶을 살았다. 사비나는 직접적인 본다는 것을 중요시했고 프란츠는 본다는 의미를 내재된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가치를 두었고 간접적인 이미지로서의 형상을 중요시했다. 사비나는 이미지보다 본질에 가까운 가치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사고를 우선했다. 때문에 자신의 조국 체코가 어떻게 되었든, 혁명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소속감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게 얽매이지 않았으며 그녀는 좀 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파악하고 생각해보고자 했다. 반면 프란츠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의미를 부여했고 공산주의와 혁명, 그리고 그와 관련해 삶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이 말하는 이미지적인 가치와 문화에 집착했다. 그가 사비나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체코라는 혁명의 중심에 있는 곳에서 예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비나는 강인하고 명령을 내리는, 자신을 바치고 싶어지는 남성으로서의 남성에게 에로티시즘을 느낀다. 하지만 프란츠의 사랑에 따른 힘은 표출되지 않았고 그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정사를 할 때에도 자신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고 눈을 감는 것이 끔찍한 사비나와 눈을 감고 이미지를 떠올리고자 하는 프란츠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띄었다. 결정적으로 사비나에게 있어서 진실이란 속에 내재된 것이며 마음속을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각자의 진실에 가까웠지만 프란츠에게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내면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그와 그녀의 사랑이란 이처럼 달랐고 그들은 그렇게 끝났지만 사비나가 떠남에 따라 프란츠는 오히려 자유를 찾고 스스로 그리는 삶을 알게 되었다. 그는 사비나로 인하여 새로운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프란츠는 죽을 때까지 사비나의 시선을 마음속에 두고 자신이 바라고 우러러보았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는 사비나를 통해서 완성되었고, 사비나를 통해 의미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사비나의 존재는 휘발성을 띈다. 나무나 가벼운 그녀는 어디에도 흔적이 없고 남아있지 않다. 그녀는 소속되지 않고 담아두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쉽게 떠나 자신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존재는 가볍다. 이미 잊혀져 관심 밖이 되어버린 '프라하의 봄'처럼 타인이란 다른 타인에게 없어도 상관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너무나 사랑했더라도 괜찮고 항상 함께 있었더라도 괜찮다. 우리들의 존재는 무력하고 가볍다. 

테레자에게 '프라하의 봄'은 지속되는 현실이고 자신의 정체성이지만 세상에 '프라하의 봄'은 옐로 페이퍼에 단순한 화젯거리가 된다. 비밀경찰들의 대화가 라디오에 울리는 것처럼 세상은 가볍고 삐뚤어졌다. 소련의 침공도, 체코도 가볍고 심지어 체코의 민주화를 위해 과거에 찍은 그녀의 사진들까지 의미를 달리하며 테레자의 존재 또한 토마시의 머리에 남아 있는 성기 냄새를  풍긴 여자들처럼 별것 아니게 된다. 그녀가 세상을 아무리 무겁게 만들어본다 한들 세상과 그녀 자신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토마시는 가부장 적에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고 테레자는 그런 그의 모습을 좋아하며 거부하지 못한다. 토마시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녀가 죽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토마시와 세계로 인해 타인에게 테레자는 필연적으로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테레자는 스스로 가벼워지고자 했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테레자는 육체를 벗어나 자신의 영혼이 토마시의 육체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테레자에게는 토마시가 우연 같은 운명이며, 토마시에게 내어준 정사와 정조란 그녀에게는 분리할 수 없는 무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무겁고, 세상은 너무 가볍다. 

토마시에게도 마찬가지로 세상은 너무나 두렵고, 반면 그의 존재는 가벼웠다. 오이디푸스는 알고 모르고를 떠나 잘못을 저질렀고 그에 대한 책임을 졌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날개를 달아준 체코의 지식인들과 시민들도 일정량의 책임과 잘못이 있는 것이다. 토마시는 그에 대한 글을 기고했지만 그의 글은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너무나 잘리고 오역된 채로 실렸고 그의 글은 그를 곤란하게 만듦과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비열함과 비굴함을 자아냈다. 토마시는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비굴함을 택하여 글을 철회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실력 있는 외과의인 그는 자신이 잘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지만 세상은 그를 가볍게 내쳤으며 그의 말은 무겁게 그를 조여 왔다. 자신은 존재는 너무나 가볍고 세상은 그를 이용하는데 서슴이 없다. 그 사건으로 인해 토마시는 오히려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서게 되지만 의도와 다른 결과로 인해 토마시는 계속 불안을 느낀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불안은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없으며 세상은 얼마든지 자신들을 이용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도청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토마시는 자신이 적은 글, 의도와 다르게 게시된 글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끝나 돌이킬 수 없다. 니체의 영원회귀란 너무나 무겁지만 역사란 이 놀랄 만큼 가벼운 선택에 따라 나비효과처럼 움직이고 인식된다. 

하지만 역시 가벼운 것이 나쁜 것이고 무거운 것이 좋은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거운 의미를 지니는 것들도 속을 들여다보면 텅 빈 채로 멍청해 보이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가벼운 것들이 알고 보면 나름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그 모든 이념도 결국 상황에 따른 선택과 해석에 따라 옳은 것은 달라지기 마련이며 중요한 가치보다 중요하지 않은 불필요한 것들에 휘둘려 존재하는 되는 때가 많다. 게다가 종국에 인간은 죽고 나면 남은 사람들이 역사를 해석해주기 때문에 자신이 바랐던 것과 전혀 다른 모양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 이루어내는 각자의 역사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체코의 역사와 엮여 각기 다른 가벼움과 무거움을 자아냈으나 그는 결국 개인의 시선과 주관에 따라 달라진다. 단 한 번의 선택에 의하여 달라지는 우리들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나는 인간의 행복과 미소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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