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不ON 문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너 Aug 20. 2016

영화 <최악의 하루> 후기

빵터지는 늦 여름의 판타지 멜로

1. 진실, 혹은 진심     


진실과 진심은 무엇이 다를까. 사랑의 감정은 진실일까 진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다리라고 부르는, 그래서 무척 곤혹스러운, 어쨌든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한다면, 두 사람을 향한 마음이 모두 진심일 수는 없을까. 만약 두 사람을 모두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일까.   

    

아니, 이 도발적 질문이 평생을 모범적으로만 살아온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물어보자. 영화에서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을 필요도 없다. 당신처럼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진심인가. 만약 진심이라면 거기엔 조금의 거짓도 포함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의 진심은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진심은 주관적 감정이고, 진실은 객관적 사실일 터. 그러니 매일 붙어 다니는 당신들, 혹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당신들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이’라고 볼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의 사랑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당신의 주관적 감정은 존중하지. 물론. 진심이라고, 진심이었다고. 그러나 딱 거기까지.      


영화 <최악의 하루> 주인공 은희(한예리 분)는 두 남자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왔다. 그녀는 배우를 꿈꾸지만 연극무대에서는 아주 작은 역할을 맡을 정도로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풋내기다. 그녀는 삶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지만 ‘최악의 하루’를 맞아 무너지고 만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은희가 보낸 그 하루를 그린다.      

진심이었다고 말하는 그녀. 그러나 그녀의 사랑이 진실이었을까.


2. 각성.      


은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커피를 즐기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한 모금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저 사람을 만날 때 습관적으로 커피를 주문할 뿐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면 항상 각성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연극 대사를 곱씹는다.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나 양다리를 걸친 이혼남 운철(이희준 분)은 진심을 다해 믿음을 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때론 귀여운 여자 친구로, 때론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조차 순정을 바친 비련의 여인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건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 은희는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올 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혼자 남았을 때뿐이다.


은희에게 삶은 연극 무대와 다를 것이 없다. 직면한 상황에서 자기 감정에 솔직하면 진실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율배반적으로 비추어지더라도 상관없다. 진심은 어차피 주관적 감정 아닌가.  그러니 서로 다른 상황에서 진심을 다 했던 두 남자가 그녀를 중심으로 한 장소에서 조우하게 된 오늘 같은 날은 정말이지 이질적인 두 개의 진심이 충돌하는 “최악의 하루”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희준은 찌질하면서 속터지는 유부남 역할을 미친듯 해낸다. 이 보다 더 이 역할에 맞는 배우는 없을 것 같다.



3. 낯선 남자 혹은 액자.      


하루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은희는 연습실 앞에서 낯선 남자에게 길을 안내해준다. 그는 영어로 기본적인 소통이 가능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 분)다. 은희는 짧은 영어로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는 출판기념회를 위해 방한했고 친절하게 자신을 약속장소까지 안내해준 은희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는 길고 힘든 하루를 끝내고 어둑어둑해진 남산 길에 혼자 남은 은희에게 다시 나타난다. 짧은 영어지만 그와의 대화는 은희에게 신선한 감흥을 준다. 대부분의 거짓은 ‘말’로 표현되기 때문에 이 일본 소설가와의 대화에서 은희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남산 산책길을 따라 이어지는 둘의 대화는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게 아기자기하다. 오히려 은희는 이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 ‘최고의 하루’를 보낸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렇게 보니 일본 소설가와 은희의 에피소드는 두 남자와 은희의 사랑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액자인 셈이다. 은희의 좌충우돌 ‘최악의 하루’ 이야기가 일본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갖고 정리되는 구조가 아닐까.     



4. 판타지 공간으로서의 서울      


영화의 배경은 서울이다. 그러나 이 곳이 정말 서울인가 싶을 만큼 소박하고 정겹다. 동화 속 공간에 어울리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서촌과 남산을 주 무대로 하는 영화답게 개량 한옥과 정겨운 골목들, 숲이 우거진 산책로가 늦여름의 싱그러운 느낌을 더한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비평가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을 보고 그들이 서울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궁금해졌다. 타자의 시선으로 본 서울은 고층빌딩과 숨 막히는 매연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남자의 입장에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밉지만 또 한 편으로 너무나 귀여워 안아주고 싶은 은희라는 캐릭터만큼이나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판타지에 가까웠다.      


개인적으로 자주 가는 서촌 골목과 남산 산책로를 스크린에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5. etc.


어지간하면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편인데 영화 주인공들에겐 금사빠에 가깝다. 여주인공 한예리에 푹 빠진 것이다. 예전에 <코리아>라는 영화에서 본 기억이 있고, 또 무슨 드라마에서 한 번 본 정도인데 이 배우를 왜 늦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이다. 다람쥐를 보며 중얼거리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스크린 속으로 뛰어들어가 이희준을 기절 시킨 후 내가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희수라는 캐릭터와 비견될 정도.       


주목받을 만큼 멋진 외모는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왠지 훈훈한 남자 이희준의 연기도 발군이었다. 특별출연인데 오히려 주연 같았다. 정말 속 터지는 캐릭터를 너무 능청스럽게 잘 소화한다.    

  

서촌과 남산 산책길을 배경으로 은은하게 때론 경쾌하게 깔리는 OST도 좋다. 당분간 무한 반복할 듯.    


  


매거진의 이전글 미술전시회 <이중섭 展>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