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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Nov 20. 2016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

무의식적인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남는다면

아기가 발을 모아 쥐고 양말을 물어뜯는다. 이가 나려는 모양이다. 젖니가 나기 시작한 아기들은 뭐든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구강기의 특징이랄까. 리비도를 찾기 위한 발버둥이라는 어느 오스트리아인의 설명이 마뜩치 않지만 딱히 다른 원인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한다.


오늘 쇼핑몰에서 만난 그 아기는 지나치는 날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양말을 물어뜯었는데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빵처럼 토실한 볼을 오물거리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건지 몰라도 유모차를 밀고 있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아기를 키울 땐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같으면 그냥 두고 봤을 것 같다. 욕망하는 것을 무조건 금지하는 건 좋은 육아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그 아기의 인생에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심지어 가족이나 자신조차 기억할 수 없는 그 한 장면을 포착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나의 일상을 매 순간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무엇에 쓰려고 그런 엉뚱한 짓을 하느냐고? 가끔 본의 아니게 과거를 회상할 때가 있지 않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회상할 수 없는 순간도 있다. 애타게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고 이불을 걷어차고 싶을 만큼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는 법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달라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지 않는가. 그럴 때 잠깐만 기다려봐. 하고 호기롭게 과거의 한 장면을 펼쳐 놓는 거다. 어때? 폼 나지 않을까.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생각날 때마다 재생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은 잘라내 버리면 그만이다. 일종의 기억편집장치랄까.


물론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충분한 저장용량의 하드디스크와 고장이 잘 나지 않는다는 독일제 캠코더를 구입하면 된다. 나의 일상을 빠짐없이 기록해 줄 사람도 한명 고용해야 한다. 아니 빠짐없는 기록을 위해 세 명은 있어야겠군. 그래야 ILO가 70여 년 전 채택한 기준대로 주 40시간 노동이 가능 할 테니 말이다. 여하튼 이런 복잡한 조건들을 다 구비했다고 한들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많은 투자로 건질만한 일상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하는 원론적인 물음이 내 고민의 표면위로 보글보글 끓어 올라올 테니 말이다. 복잡한 건 그냥 하지 않는 게 수다. 공상이든 환상이든 복잡한 건 가뜩이나 더러운 성질을 더 더럽게 할 뿐이거든.


사진이 발명되기 전, 사람들에게 순간을 포착하여 남길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수의 귀족들만이 화가의 재능을 빌어 자신의 초상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 초상화들조차도 사실 순간의 포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거의 자신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연출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기록으로 남게 된 모든 이미지들은 타인의 눈에 포착된 것들이다. 신화와 역사를 그린 작품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실적 풍경과 군상들을 남긴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도 몇몇 자화상들을 제외하면 모두 타인의 시선에 포착된 누군가의 이미지일 뿐이다. 인위적이지 않은 무방비의 순간을 포착하여 간직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의식을 하는 순간 이미 이미지는 가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아기처럼 의식하지 못한 일상은 타인의 기억(기록)에 남을 뿐이다. 유명 관광지에서 찍은 기념사진에 담긴 생면부지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라는 존재는 타인을 통해 투영될 때 비로소 실체가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은 나의 일상들은 타인의 망막을 통해 뇌의 저장소에 누적된다. 그리고 그 누적의 총합이 나라는 존재를 평가하는 데이터가 되는 것이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나의 망막이 아니고 나의 뇌가 아니기 때문에 편집도 불가능하다. 의도치 않은 순간들이므로 자의적 왜곡도 불가능하다.


가끔 이슈가 되는 인물과 관련된 이런저런 비화들이 알려질 때가 있다. 타인의 기억 속에 그 인물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장된 기억도, 의도적으로 왜곡된 기억도 있겠지만, 그 비화들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한 일상의 단면이기에 비교적 객관적인 (대상자의 주관이 배제된) 기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 항상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살자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게 가능하지도,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적어도 정도를 벗어나 표리부동하게 사람들에게 이 사실은 끔찍한 충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은 타인의 기억에, 타인의 기록에 살아남는다. 그게 우리가 늘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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