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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18. 2019

소설 <체공녀 강주룡>후기

을밀대는 고구려가 평양에 세운 망루다. 평양 금수산 자락 위에  12미터 높이로 올라앉은 이 망루는 대동강과 모란봉이 내려다보이는 풍광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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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겐 기껏 평양냉면 맛집으로 유명한 이름이지만 80여 년 전 을밀대 지붕 위에서 벌어졌던 목숨을 건 항일운동의 이야기는 냉면집  만큼도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70주년이던 2018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 분의 이름을 언급하기 전까지는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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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성의 독립운동은 더 깊숙하게 묻혀왔습니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평양 평원 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였던 강주룡은 1931년 일제의 일방적인 임금삭감에 반대해 높이 12미터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 농성하며,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외쳤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저항으로 지사는 출감 후 두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지만,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대통령 2018년 광복절 기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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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고공농성,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에 몸 바쳐 항거한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 소설 <체공녀 강주룡>은 대통령이 언급한 실존인물 강주룡 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역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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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은 1901년에 태어나 1932년까지 살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최전빈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신랑과 서간도 독립군 부대에 합류하여 항일 운동을 하지만 그녀를 그곳으로 이끈 것은 애국심이 아니었다. “당신(최전빈)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주룡은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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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주룡이 사랑하는 신랑과 함께하는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최전빈은 17세의 나이로 이국에서 갑작스럽게 병사한다. 남편의 죽음 후 주룡은 시댁 사람들로부터 남편 살인죄로 고발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간신히 감옥에서 풀려난 주룡은 홀로 도망치듯 평양으로 건너 가 고무 공장의 시급 노동자로 취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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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따라서 이주하고, 시집을 가래서 가고, 서방이 독립군을 한대서 따라가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주룡에게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저 자신이 정하는 경험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다. 고무 공장 직공이 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일말 서러운 일일지언정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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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집갈 마음도 없고,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집이니 땅이니 하는 것도 관심 없고 그저 제 한 몸 재미나게 살면 그만이었던 주룡은 “극장 구경도 하고 커피에도 맛을 들이고 양장도 맞춰보고 빼딱구두에 실크 스타킹이니 하는 것도 신어보고 고무 냄새 나는 보리밥 먹어가며 내가 번 돈, 날 위해 쓰겠다”고 다짐한다. 주룡은 당시에 유행하던 신여성(모단걸 MODERN GIRL)을 꿈꾸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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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착취당하던 어린 여성들의 삶을 알게 된 주룡은 거칠고 위험한 노동운동의 세상으로 뛰어들게 된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던 주룡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는 노동조합을 이끌던 지식인들의 위선과 허위를 자기만의 언어로 비판하며 항일노동운동의 선봉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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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가 불어 닥쳐 식민지 노동자들의 삶이 최악으로 치닫던 1931년, 주룡은 평양고무공업조합의 공장주들이 임금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데 항의해 단식투쟁을 하며 파업을 벌이다가 홀로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하지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며 12미터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농성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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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간 반 만에 일정 경찰에 체포된 주룡은 옥에서도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출감 두 달 만에 서른둘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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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은 실존인물의 삶을 그 시대의 언어로 풀어낸 소설이다. 신인작가 박서련이 얼마 되지 않는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을 불어넣어 만들어 낸 소설 속 강주룡은 배운 것 없으나 품이 크고 기백이 넘치는, 요즘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현대적인 여성으로 되살아나 읽는 이들에게 크나 큰 감동을 준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박서련 작가는 이 놀라운 소설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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