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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ug 31. 2019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의 사랑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2019, 정지우)> 후기

연락이 안되면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이 있었다. 나역시 그랬다. **공항 국내선 저녁 6시. 이렇게만 정해두고 나온 외박이었는데 하필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고 비행기는 결항되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공항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군인이었기에 삐삐조차 있을리 없었다. 평소 그녀라면 어떻게 할까. 오로지 감에 의존하여 나는 고속터미널로 방향을 틀었다. 눈길을 헤치고 달려온 버스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는 플랫폼에서 출발지 이름을 앞 유리창에 내건 수십대의 버스를 확인하며 세시간을 더 기다려야했다. 그렇게 엉망이된 외박 첫날, 밤 열한시쯤이 되서야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내가 터미널에서 기다릴 줄 알았다고 했다. 애틋한 마음만 있다면 무작정 기다리고 그리워하면서도 견딜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생각해보면 계속 인연이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기적같았던 그 시절.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 시절의 이야기다. 1975년생 토끼띠 미수와 현우는 우연한 만남과 아쉬운 이별을 되풀이하며 떨어져 살아가지만 서로를 잊지 못한다. 첫 만남의 장소 '미수제과'가 두사람의 평생 플랫폼이듯, 짧은 만남의 기억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하여 말로 내뱉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키워드'가 된다. 이 '키워드'들은 비록 파편화되었을지언정 각자의 고단한 삶을 견디는 힘의 원천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현우와 미수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보내야 했던 삶의 곡절이 생략된 만큼,  관객은 극의 흐름이 매끄럽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단락이 지나고 나서야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한 손에 넣을 수 있는, 스마트한 시대의 이야기라면 듬성듬성 구멍이 난 채로 내놓을 수 있었을까.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간절함과 우연성에 기댈수 밖에 없었던 딱 그 시대의 이야기를 라디오 주파수를 찾을 때와 같이 레트로한 느낌으로 담담하게 풀어낸다.



영화의 제목도 그렇지만, 라디오는 시대 감성을 공유하는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매체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다. 수없이 많은 타인들의 사연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꽃편지지에 사연을 적어 보내고, 자신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오길 기다리던 그 복고적 감성말이다. 이 감성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이 영화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한번쯤 소개되었을 법한 사연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오랜만에 보는 멜로다. 가늘고 기다란 눈커플과 오종종한 입모양이 예쁜 김고은과 웃을 때 귀티가 나는 정해인이 한 화면에 잡히는 것만으로도 싱그럽다. 이소라, 핑클, 루시드폴, 콜드플레이 등 한 때를 풍미하던 명곡들이 귀를 즐겁게 한다. IMF시대에 사회로 내몰려 방황하던 청년들과 어두운 과거를 짊어진 한 청년의 좌절,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지만 기적 같은 사랑을 그린 영화다. 기승전결 명확하고 러브씬 화끈하고, 복선, 반전, 서스펜스, 스릴 뭐 그런거 좋아하는 사람에겐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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