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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Feb 22. 2016

커피한잔의 여유는 개뿔

대가리, 라고 부를만한 부분이 어딘지 쉽게 식별할 수 없다. 자세히 보면 절취선이라는 글씨가 사람 보라고 적혀있는 것인지 의아할 만큼 자그맣게 인쇄된 곳으로 부터 점선이 시작되고 사람들은 그 점선의 궤적을 보고나서야 그래도 그 주변이 대가리가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절취선을 따라 천천히 절취,하기 전 손가락으로 몸통 부위를 톡톡 튕겨준다. 소주병을 따기 전 병의 아랫부분을 팔꿈치로 툭툭 쳐서 털어주는 식이다. 소주를 따기 전, 왜 병의 밑을 툭툭 쳐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민간에서 오랜 시간 내려오는 전통요법은 가급적 닥치고 따르는 게 좋다. 혹시 이런 주술적 행위가 몸에 좋지 않은 성분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이 녀석도 마찬가지다.


약품을 섭취하기 전 꼼꼼하게 복용설명서를 읽어보는 심정으로 녀석의 길쭉한 몸뚱아리를 구석구석 찾아보지만 그 어디에도 절취선을 따라 절취, 하기 전에 손가락으로 두어 번 튕겨주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경고는 없다. 그래도 약속을 이행하듯 튕겨준다. 흔들어주세요~!라고 눈웃음을 날려주던 효리를 생각하니 목이 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안해 효리야. 까먹을 뻔 했어.  아, 이건 참이슬이 아닌 거다.


녀석의 목을 따고 나면 일사천리다. 원래 이런 녀석들의 존재 방식 자체가 속성으로 만들어지고 LTE 속도로 사라지는 것이라서 주저할 일도 뜸을 들일 이유도 없다. 폴리에틸렌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몸통 ‘안’(IN)에 차곡차곡 ‘쌓여있던’(STANT) 백설탕과 12.1%의 커피와, 물엿과 식물성경화유지, 천연 카제인으로 만들어진 프림 가루 따위가 차례대로 종이컵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그 위로 팔팔 끓는 물을 부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쉬운 녀석이 세상에 또 있었다니. 삼분 만에 얼큰한 육개장 맛을 내주겠다는 사발면 보다 호기로운 녀석이 아닌가.


사실 ‘커피 한잔의 여유’와 같은 카피는 인스턴트커피와 어울리지 않는다. 빠르고 간편하게 따라 마시고 또 다시 밀려드는 일을 처리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인스턴트 커피는 여유를 위한 음료라기보다 각성을 위한 약품에 가깝기 때문이다. 종이컵 안에 들어 있는 검은 액체를 탕약 삼키듯 삼키며 목구멍에 뜨끈한 것이 식도를 타고 위벽을 적시는 느낌을 받을 때, 그 느닷없는 자극을 ‘여유’라고 느끼도록 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 아닐까.


커피의 목을 따며 생각한다. 설탕 조절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인스탄트 커피가 갑자기 생활에 여유를 가져다주진 않는다. 무지방 우유를 사용했다고 해도 자작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이 함유된 설탕을 사용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저 인스턴트커피는 딱히 입맛 다실게 없는 오후의 공복을 잠시 잊게 해주는 간식이며 휴식이 절실한 사무직 노동자에게 가상의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근로의욕을 충전시켜주는 각성제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INSTANT는 찰라의 시간만큼도 노동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자본의 음모가 낳은 가장 잔인한 발명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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