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대형 서점에 갔다. 소설책을 몇 권 사볼까 해서.
불과 한 두 달 전엔, 출근하면 일층에 책들이 있으니 책을 사는 일이 잦았는데, 퇴사를 하고 나니 책을 사려면 서점에 가야 했다.
찾는 책이 자리에 없어 직원분께 여쭸더니 내가 아까 책을 찾았던 곳으로 고개를 슬쩍 돌리시더라. 그 자리에 그 책이 없는 걸 보곤 다른 코너로 돌아가 찾아와 주신다며 내가 들고 있던 책 제목이 적힌 종이를 가져가셨다. 멀뚱히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 직원분의 책상에 놓인 지우개를 봤다. 몸통 띠지가 벗겨져있고 양쪽 모서리가 어느 정도 닳아져 있는 지우개. 그걸 보며 지우개 한 개를 사서 온전히 다 써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는 것 같은데, 뭐 이런 생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분은 내가 찾는 책을 두 권이나 들고 오셨다. 한 권은 내게, 또 다른 한 권은 내가 처음 책을 찾으려 했던, 원래 그 책이 있어야 할 책장에 꽂아두기 위함이었다. 그러곤 다시 본인의 책상으로 몸을 돌리시는데, 문득 그때, 그 직원분과 저 지우개가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가 난 듯 없는 듯 전체적으로 둥글고 하얀 얼굴과 움직임이 그랬다.
새 책을 받아 들고 보니 찾았다! 라는 안도감보단 글쎄, 어딘가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책을 펴 읽어낸 자욱이 앞쪽만 가득한, 어제 방 정리를 하며 다시 높게 쌓아둔, 책들이 아른거렸다.
책을 사는 건 쉬웠지만 그 책을 다 읽어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언제부턴가 책을 사서 조금 읽고선 쌓아두기만 하고 있었던 거다. 그게 벌써 수십 권이었다.
오늘 사려던 새 책은, 같은 책이 꽂혀있는 책장에 나란히 다시 꽂아두고 나왔다. 이 추운 날 굳이 서점까지 왔고 심지어 직원분께 부탁을 해서야 찾은 책이지만.. 아까 그 지우개를 보고 든 마음 때문이었다.
쓰다 만 지우개를 당장 다 쓰는 건 다소 억지스러운 일이겠으나, 읽다 만 책들을 다 읽어내는 건 그렇지 않은 일일 테니까.
올해는 책을 사기보단 사둔 책들을 다 읽어내 봐야겠다. 이렇게 올해의 첫 목표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