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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항을 떠나 올 때도, 스키폴에 잠깐 들렀을 때도, 그리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도 비가 왔다.
그리고 gare du nord 에서 S를 만났을 때에도, 에어비엔비 체크인 시간까지 두세 시간이 남아 카페에 앉아 커피 5잔, 오렌지 쥬스 1잔, 그리고 양파수프와 간단한 스크램블 요리를 먹을 때에도, 계속 비가 왔다.
비를 피해 들어와 비가 멈추길 기다리는지, 카페엔 우리처럼 추가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체크인 시간이 다 되어 나와 걸었고, 너도 나도 초행이지만 다행히 숙소 앞에 잘 도착했다.
백팩 때문에 허리를 계속 굽히고 왔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계단만으로 7층 !!
친절한 집주인 세바스티앙은 몸소 내려와 제일 큰 내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 주었다. 그렇게 계단엔 숨이 찬 세 사람의 숨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ㅋㅋㅋㅋ 0층부터 6층까지.
그리고 도착한 숙소는. 우와. 사진보다 살짝 작았지만 그거 외에는 너무 만족스러웠다. 숙소 얘기는 나중에 따로 써봐야겠다.
S는 리옹에서 만난 두 살 터울의 동생이다. 리옹에선 사실 인사만 가볍게 하는 사이였는데, 이렇게 까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둘 다 기억을 못 한다.
갑자기 휴가를 받은 S에게 나는 예약한 숙소에 같이 머물러도 되니 파리로 오라 했고, 그녀는 정말로 왔다. 또라이는 또라이를 알아본다고... 둘 다 서로 또라이라며 혀를 둘렀다. 재재작년 휴가 때도 일정을 맞춰 파리에 머물렀었기에 이번 여행이 함께 보내는 두 번째 파리였다.
짐을 풀고 간단히 쉬다가 나왔다. 그리곤 서로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어디 가지?'
두 번째 같은 도시를 방문해서였을 수도, 그리고 비가 와서였을 수도 있다.
비가 안 왔다면 저번에 왔을 때 처음으로 갔던 villa la roche로 갔을 테니까.
얘기를 나누다가 둘 다 안 가본 곳, grand palais로 행선지를 정해 걸었다.
도착한 그곳에는 특별전 두 개가 열리고 있었다.
Greco 와 Lautrec.
그레코는 내가 만약 종교적인 배경 지식이 많다면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림을 둘러보다 발견한 건 그림 구석에 있던 저 종이들.
그리고 로트렉.
익숙한 그림체가 우릴 반겼고, 새로웠던 그림들도 많았다.
전시를 다 보고 다오니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시간 대부분은 로트렉 전시관에서 다 썼을 만큼, 작품 수도 작품 수지만 집중해서 볼 수 있는 포인트들이 많았다. 가지고 있던 배경 지식이 짧았기에 새롭게 느껴져 나에겐 ‘로트렉의 새로운 발견’이 주인 전시였다.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화면을 구성한 구도라던가, 특히 사람을 그리려면 일정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해야 함인데,
그의 그림 속엔 그림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대신, 로트렉이 눈앞의 행동을 순간 포착하여 그려낸 사람들이 있었다. 덕분에인지 사람들은 경직되어 있다기 보단 활동성이 있었고, 찰나의 순간을 그냥 사진 찍은 것처럼 잠시 앉아 사색에 잠긴 사람들의 표정들이 생생했다.
색을 다양하게 쓴 것도 좋았고, 머리카락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도 그만의 특징이 두드러져 그런 그림을 보면 한없이 서있다가 핸드폰에 담았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이 두 개.
한 개는 원래 알고 있었던 건데 로트렉 그림인 줄 몰랐다.ㅋㅋㅋ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오늘의 발견.
비가 와서 그런 건지 전시장 내부엔 관람을 하러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사실 전시를 보러 가서 내부 설명을 잘 읽지 않는 편이라 현대 미술을 주로 찾곤 했다. 내가 본 대로 해석하면 그것도 답이 될 수 있으니까.
반대로 고전 미술은, 배경지식이 없어서 오는 심리적인 불편함이 상당한 편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은 걸 이해를 해보려는 노력도 없었으니까... 배워서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부담감이 왜인지 모르게 지배적이었달까. 헌데 요즘 현대 미술은 점점 어려워지고... 그래서 고전 미술을 보면 잘은 몰라도 일단 '뭘 그린 건지'는 비교적 쉽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게 마음이 편안해지게 하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다.
특히나 오늘은 배경지식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걸 해봤는데, 그랬기에 흠뻑 빠져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내 나름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전시를 구성한 사람 입장에서 둘러보기 : 이 그림엔 이 액자, 저그림엔 저 액자. 전시 관마다 다른 페인트 컬러라던가 조명 위치라던가, 작은 그림과 큰 그림들의 배치 같은 거.
두 번째, 그림을 그린 사람 입장에서 둘러보기 : 화면을 구성한 구도, 어떤 색감을 썼는지, 그래도 종종 그림을 그려왔다고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을 이 사람은 어떻게 표현해냈나 들여다보는 거다. 그래서인지 아까 위에서 언급한 대로 컬러를 다양하게 쓰는 거라든지, 머리카락이나 표정을 묘사한 마무리가 돋보였다.
S 역시 현대 미술을 좋아하지만, 고전 미술에도 사전 지식이 깊은데 그럼에도 전시장에서 설명을 읽는 것에 시간을 할애할 줄 알았다. 한국어든 영어든 읽어왔으니까 그녀의 배경지식은 점점 축적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같은 전시를 보더래도 서로 얘기 나누면서 보면 같은 걸 보고서도 다른 생각을 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게 참 재밌다. 그레코를 보고서는 당 시대 사람 같지 않는 화풍이라고 얘기해주길래 나는 갸우뚱했지만 보다 보니 뭉크 같은 그림이 있었고, 그걸 보며 아까 S가 한 얘기가 이런 거구나 했고 ㅎㅎ
근데 이번 전시를 보고 그녀가 액자와 전시장 벽의 색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놀랍기도 하고 기뻤다.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의 세계가 확장되고 깊어지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본 느낌이랄까. 기뻤던 건 사실 어떤 감정의 근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뭐라고.. 근데 진짜 그랬다. 그런 그녀 덕분에 같이 얘기 나눌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그녀 쪽으로 가려면.. 일단 전시장에 있는 텍스트를 들여다봐야 하겠지..?
두 시간 반을 집중하면 사람은 힘이 빠진다.
밥을 먹으러 palais de tokyo로 향했다.
이곳으로 올 때마다 지나게 되는 스폿에서 그래도 에펠탑이다!! 하고 사진도 찍고.
사실 밥을 먹고 전시를 볼 요량이었으나, 무리라는 결론을 내고 그곳에서 식사만 하기로 했다. (우린 각자의 상황 파악이 빠른 편이다)
자리에 놓인 유리컵 입 주변을 손가락으로 만지다가 '어, 이거 처음부터 컵으로 만든 게 아니고 병으로 된 걸 자른 거 같아’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병 아래 오목한 부분이 있어 귀엽네 했었는데, 가만 보니 이 볼록한 게 컵마다 다 다르고, 유리의 색도 약간씩 달랐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보고는 확신을 가졌던 거다. 둘러보니 발견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이런 위트가 참 재밌다. 드러내진 않지만 재활용도 하고 이쁘기까지 하니까. 이건 누가 생각해낸 걸까. 그 사람은 평소에 뭘 보고 어딜 갈까?
둘 다 각자의 식사를 깨끗하게 비우고, (정말 맛있었다...) 디저트까지 먹고 나왔다.
피곤함+노곤함+배부름으로 장을 간단히 본 후 우버를 탔다. 동네 자체가 위험지역이라 소문이 났으니, 밤늦게 돌아오는 일은 만들지 말자가 첫 번째 목표였는데, 첫날부터 그걸 못 지키게 되었으니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호사를 누릴 수밖에 없었던 거다.
차창 밖으로 파리 시내를 본다. 거리의 뤼미에르는 켜진 곳도 있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려 아직 켜지 않은 곳도 있다.
비는 아직도 오다가 말다가 한다. 일주일 예보를 켜본다. 춥고 춥고 비비비비비.
집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와서 글을 쓸까 했지만 이내 접고 예산 정리를 좀 했다.
식탁보 너무 벗기고 싶다... 맘 같아선 당장 벗기고 싶은데 내일 세바스티앙이 오전에 라디에이터 점검하러 온다 했기에 일단 두기로 ㅎㅎ
그러다가 두시가 넘어 누웠고, 이 글은 다음날 여덟 시에 눈을 떠 쓰는 글이다.
헌데 인터넷에 문제가 생겨 저녁에서야 올리게 되었다.
하루에 글을 한 개씩 쓰기로 했지만, 이렇게 오늘 뭐했고 어디 갔고 뭐 먹었고를 나열할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고 덕분에 사진도 잔뜩 글도 잔뜩..
앞으론 이렇게 안 쓰리라 다짐하며 긴 하루였던,
11월 18일 월요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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