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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여덟 시에 눈을 떴다.
역시나 하루 일과 중 제일 첫 번 째는 거실 창문을 열고 그 밖으로 몸을 내어 하늘을 보는 것이다. 어제와 달리 구름 한 점 없었다. 대신 비행운이, 비행운들이 온 하늘을 마구 할퀴어 놓아 있었다.
오늘은 정말로, 유난히 하루 종일 비행운들이 하늘에 가득하던 날이었다. 이 하늘을 보고 나서야, 아 내가 프랑스에 있구나 실감을 했다.
비행운이란 :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갈 때 생기는 가늘고 긴 꼬리 모양 구름으로, 항공기 엔진의 연료 연소 과정에서 배출되는 뜨거운 배기가스의 수증기와 매연 입자가 높은 고도에서 찬 공기와 만나서 얼어붙어 생성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행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평소에 하늘을 많이 보는 편이다 보니, 어학연수 시절 올려다보았던 10개월 중에 선명한 비행운들을 꽤 자주 봤던 기억이 깊게 남아있다.
'비행운'이란 표현을 알게 된 건 어느 소설가의 책에서였다.
단편집이었기에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한 챕터씩 읽어야지 했었는데, 세 챕터를 읽고는 머리맡이 아닌 책장으로 자리를 옮겨두었다. 그 이유는 한 챕터씩 읽고 잠들었던 밤에는 꼭 악몽을 꾸었기 때문인데, 그것도 꼬박 삼일이나 식은땀을 흘리며 깨고 나서야 알았다. 내게 저 책은 '잠들기 전 읽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무튼 다시 오늘로 돌아오자면,
무수한 비행운 아래에서 걷고 또 걸었다.
현재의 위치에서 다른 목적지를 정했을 때, 곧장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경로도 또 다른 목적지를 발견할 셈 치고 걷는 편이다. 오늘 구글 맵에서 알려준 건 30분 거리였다만 실제 도착하기까지는 약 세 시간이 걸렸다.
서점이 많은 지역이었어서 서점을 구경하고, 문구점에도 들르고 카페에도 들렀거든 ㅎㅎ
서점은 모르겠지만 문구점은 내게 어느 도시를 구경하든 필수 코스다.
그리고 절대 빈손으로 나오질 못하는 곳이기도 하고... 오늘 들렀던 문구점에선 익살맞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는 일력을 들고 나왔다. 비록 그다음 들렀던 문구점에서 3유로나 더 싸게 파는 걸 봤다만..
오늘 들렀던 서점은 총 4곳 정도.
한 곳은 종교적인 신화?에 관련된 주제로 책을 모아두었고,
두 번째 들렀던 곳은 철학책만 있는 곳이었다.
세 번째 들렀던 곳은 큰 서점이나, 우리가 방문했던 섹션은 중고책 코너.
그리고 마지막은 퐁피두의 서점.
첫 번째와 두 번째 들렀던 서점은 그 내부의 고유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우선적으로 신기했던 건
'이 주제들 만으로도 서점이 꾸려진단 말이지?..'였다.
응 가능했다. 직접 보고서도 잘 안 믿어졌다. 심지어 내부에 책을 읽고 있던 사람도, 드나드는 사람도 끊이질 않았는 걸.
결국엔 나도 책을 하나 사 들었다. 마지막 들른 서점에서 발견한 로트렉의 책이었다.
이상하게 만큼 손에 착 감기는 그런 책들이 있다. 로트렉 작품을 토대로 그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었는데, 그게 '그런 책'이었다. 서울로 이 책을 가져갈 때, 처음 손에 감겼던 느낌보다 더 내 손에 알맞게 닳은 책이 되길 바라며 (구매한 책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걸 좋아함)
그러고 보니 비행운이 가득했던 하늘 아래서, 나 역시 땅에 비슷한 걸 그리고 다녔던 건 아닐까?
나 역시도 거리의 이곳저곳에 경로를 그려놓은 셈인 거다. 비록 하늘의 그것보다 깊게 자국을 남긴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보이지 않는 듯 하나 분명한 길로 걸어간 내용은 동일할 테니까 말이다.
조금 더 넓게, 오늘 본 하늘을 사람의 인생에도 비유해볼 수 있겠다.
굵은 직선만을 남기는 사람도 있겠고, 얇지만 여러 개의 선을 남기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다.
갈피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 모든 비행운은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는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일 테니까요.
나의 비행운은 어떠려나? 또 여러분의 것은 ?
아 그리고 오늘! 드디어 거실에 있던 테이블 위의 물 빠진 붉은색의 천을 걷어냈다.
속이 다 시원.. 드러난 테이블의 상판은 붉은 갈색인데, 식탁보를 벗겨내고 나니 동전 올려놓는 소리가 좀 사납다는 걸 빼면 200% 만족.
조명에 비친 곳을 보니 표면에 이미 나있는 흠집들이 제법 보인다. 헌데 같은 모양이 없이 어떤 건 하얗게 파여있고, 어떤 건 도장 내부 표면이 갈라져 생긴 거라 볼록한 자국이 길게 남아있다. 너도 있구나, 비행운 !
식탁보를 벗겨냈을 때 매끈하기만 했다면 그 깨끗함이 되려 내게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루이가 말하길 (세바스티앙에서 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정말 친절하고 풍기는 뉘앙스로 짐작되었듯이 예술 쪽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토요일엔 같이 일하는 친구가 팔레 드 도쿄에서 공연을 한다고 ! ) 내가 본인의 거의 첫 번째 손님이라고 했던 걸 기억하기 때문에 더더욱.
근데 이렇게 미리 남겨진 자욱들을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내 물건이 아니니 조심히 다뤄야겠지만, 사용 중에 피치 못해 작은 흠집을 남기게 될 게 분명한데 말이지 !
테이블 위에 남겨진 나의 흔적이 기존의 흔적들과 모여 하늘의 비행운과 같은 모양새를 띠게 될 걸 생각하니 재미있다.
사실 글을 쓰기에 앞서 뭘 써야 하나.. 이제 고작 삼일 차면서 고민을 했다.
떠올렸던 비행운은 생각보다 많은 연관과 생각을 하게 해 주었고 덕분에 이렇게 또 글이 완성되었다.
고민이 되더라도 피하지 말고 이렇게 계속 부딪쳐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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