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이고 싶었다.

지금도 빛나고 있어

by 창업가제이

빛나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


'아이와 일'


시윤과 채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친구와 한자의 뜻을 찾아가며 지은 아이들 이름이다. 비로소 시 빛날 윤, 비단 채 빛날 윤. 나에게 온 아이들을 빛나게 키워야지 했다.


서른넷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데, 아이를 키우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의 우주라는데 나는 우주가 될 만큼 마음이 큰 엄마는 아니었다. 왜 나에게 아이가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맘 졸였던 예비 엄마는, 진짜 엄마가 되자 도망치고 싶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고 기저귀를 찬 엉덩이를 마구 때려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엄마 품에서 잠든 아이를 보면 후회하고, 또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 어떤 날은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작은 손을 붙잡고 현관에 아이를 끌어다 놓기도 했다. 소리 지르고 아이를 끌어당기면서도 ‘내가 지금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정말 미쳐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고 무서웠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첫째 돌잔치를 치를 때쯤, 일을 찾기 시작했다. 쉼표를 찍었던 나의 경력을 다시 이어 가고 싶기도 했지만, 아이를 놓을 수는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이어온 경력을 지우고 다른 일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이를 등에 업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방문 교사 일을 찾아냈고, 4년제 대학을 졸업하면 무난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동 거리가 멀어서 차가 필요했다. 남편과 나는 이율이 20프로가 넘는 중고차를 덜컥 계약했다. 2012년식 분홍색 스파크. 장롱 면허였던 나의 첫차다. 남편이 한 번, 친정아빠가 한 번. 두 번의 도로 주행 연습을 하고 바로 운전대를 잡았다. 차를 산 지 2주 만에 보험사를 두 번 불렀다.


서너 살이 된 아이들부터 초등학생까지 은물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시간당 페이는 좋았지만 이동 거리가 멀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에 일을 시작해야 했다. 집에 있다가 일을 하니 재밌었지만,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나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생겼고, 난 또 아이를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맡았던 수업은 진행하고 수업을 늘리지는 않았다. 막달까지 귀여운 여자아이 한 명을 가르쳤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였는데 나를 좋아했고, 그래서 더 예뻤다. 둘째를 낳고 집에 있을 때 그 여자아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가 다른 선생님한테는 적응을 못 한다고. 안타까웠고 아쉬웠다. 하지만 내 두 아이의 육아가 먼저였다.


아이들이 조금씩 커 가고 우리의 신혼집은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매일 집 안을 뒤집어엎고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데도 도무지 감당이 안 되었다. 결정적으로 아이가 사자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닐 공간이 없었다. 남편의 월급으로 이사는 무리였다. 둘째 돌잔치를 하자마자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일을 찾기 시작했다. 경력에 쉼표를 찍은 지 5년. 일한 시간과 쉰 시간이 같아진 때, 내가 돌아갈 곳이 있을까.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더라도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 나도 오피스룩을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도면을 그리고 싶었다. 아닌 도면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었다. 캐드를 손에 놓은 지 오래지만, 다시 캐드 창을 열면 몸과 손이 기억하리라는 걸 알았다. 매일 이력서를 10 통도 넘게 보냈다. 전화는 오질 않았다. 나 잘 나갔었는데……. 마감 때면 손이 보이지 않도록 도면을 쳐냈는데, 그린다는 표현보다 도면을 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나는 쉼표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들 입장에서는 그냥 마침표였다. 경력의 마침표. 그다음 문장을 이어 나가기 힘든 마침표.


일이 필요했다.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쳤고, 집안 살림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다. 한참 일을 찾아 헤매던 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친구랑 통화하며 집에 돌아왔다. 그날은 6개월에 한 번 하는 정수기 점검 날이었고, 점검하시는 분은 예정된 시간보다 좀 일찍 오셨다. 정수기를 점검하는 동안 나는 계속 통화를 하며 할 만한 일 없느냐는 이야기 나눴다.


점검을 마치고 나에게 물으셨다.


"일하시려고요? 이거 괜찮아요. 한번 해 볼래요?

시간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요."


그 자리에서 지국에 통화를 하셨고 그날인가 그다음 날 바로 면접을 봤다.


그렇게 두 번째 일이 시작되었다. 코웨이 레이디. 코디가 아이를 업은 나의 두 번째 일이다. 서른넷. 나는 지국에서 가장 어린 코디였고, 지국장님을 비롯한 팀장님에게 예쁨을 많이 받았다. 한 달 동안 이어진 교육도 재미있었고, 열심히 했다. 필기시험은 만점을 받았고 실기 시험도 열심히 준비했다. 머리를 쉬었더니 어떤 공부도 다 재미있었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던 나는 코디를 준비하면서 아이라이너를 그리고 빨간 립스틱도 발랐다. 입술과 함께 나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내가 활기차지자 남편이 가장 좋아했다. 오랜 시간 쉬다가 일을 해서인지, 나의 사회생활을 축하하는 건지 주변에서 렌털도 많이 해 주었고 나는 결혼 전에 받은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모유 수유 다음으로 어려운 일이 영업이었다. 정말 입이 안 떨어지는데 그래도 주변에서 힘을 많이 주셨다. 내가 입사한 뒤로 삼십 대의 코디들이 많이 들어왔다. 모두가 어린아이를 육아 중인 엄마들이었다. 친구들은 거리가 멀거나, 관심사가 다르거나 해서 만나기가 힘들고 만나더라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지국에서 만난 언니들은 하는 일도, 집안일도, 육아도 다 비슷하니 정말 잘 통했다. 일 마치고 아이들과 한 집에 모여 저녁을 먹기도 하고, 일이 비는 시간에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장도 같이 봤다. 영업은 힘들었지만 살 것 같았고 행복했다.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일하다 중간에 부동산에 계약서를 쓰러 가고, 일하다 중간에 이사할 집을 청소했다. 4층 빌라에 4층. 또 4층을 오르내려야 해도 좋았다. 햇살이 좋은 아이들이 사자 자동차를 탈 수 있는 거실이 있는 집이었다. 이사를 하고 코디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남편의 회사생활도 안정이 되고 내가 돈을 벌지 않아도 생활이 유지되자 코디 일이 힘들어졌다. 뭔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다른 일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2년은 나를 육아 우울증에서 끌어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조금 나를 되찾았고, 친구는 나에게 케이크를 사서 우리 집에 왔던 날, 나의 모습에 비하면 환골탈태했다고 했다. 지금이 훨씬 예쁘다고. 누군가 결혼 전으로 돌아갈래? 하면 난 단박에 거절할 것이다. 난 아이들이 스스로 먹고 스스로 옷 입는 지금이 좋다. 나라는 폴더를 찾기까지가 참 힘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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