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오직 한 사람
그녀의 어머니는 숨겨진 존재였다. 이미 결혼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리 로랑생의 이름 앞에는 '사생아'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한 남자의 숨겨진 존재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가능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로랑생을 키우고 싶었다. 딸이 교사가 되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는 어머니의 뜻과 달리 로랑생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사생아라고 해서 죄인처럼 살아갈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로랑생은 피카소의 소개로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 역시 사생아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인지 대화도 잘 통했고 서로의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말도 잘 통하고 애인 없는 미혼의 두 청춘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건 금방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따뜻하고 달콤했다.
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까. 로랑생은 아폴리네르를 만나는 동안 예술적 재능이 만개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사랑의 효과!
그렇게 몇 년쯤의 연애기간이 지속될 무렵 루브르 박물관에 있던 작품 '모나리자'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아폴리네르가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에 대해 부정적인 글을 썼던 게 의심을 사게 했던 모양이다. 물론 진범은 따로 있었지만 범인을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아폴리네르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일 때는 대개 가족과 연인이 그 사람을 감싸주어야 훈훈한 그림이 나오는 건데, 로랑생은 그 무렵 그를 떠났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랑이 식었는데 때마침 사건에 휘말렸으니 이 기회에 이별한 것인지, 도둑으로 몰리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너무 실망스러워서 사랑이 식은 것인지는 로랑생만 알고 있는 상태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독일 사람과 결혼해서 독일로 떠나버렸다.
사랑 얘기는 일반적으로 여기서 끝난다. [사랑했지만 헤어졌고, 각자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더라로 매듭지어지는 게 보통인데 로랑생의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전쟁에 나갔던 아폴리네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이혼한다. 그녀의 이혼에 옛사랑의 죽음이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는 그녀만 알고 있겠지.
이혼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 작품 활동을 하던 로랑생이 일흔세 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하기를,
- 내 무덤에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같이 묻어주세요.
20대에 몇 년 사귀다 헤어진 남자의 편지를 같이 묻어달라니! 로랑생의 전남편이 그 유언을 들었다면 얼마나 열 받을 일인가! 나랑 살면서도 그놈을 잊지 못했단 말인가! 하지만 아폴리네르 입장에서는 몹시 흐뭇한 유언이다. 나를 잊지 않았다니, 알러뷰 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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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따금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쓸데없는 상상을 한다. 영화 주인공들처럼 갑작스럽게 몇 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면 나는 눈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굴 만나고 싶을까. 가족을 제외하고 떠오른 얼굴이 하나 있다. 옛사랑이다. 그에게서 받은 선물 중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만년필을 같이 묻어달라는 부탁까지는 안 하겠지만, 그 얼굴이 보고 싶어 질 것 같긴 하다. 그가 나를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중요하다. 멀리서 잠깐. 그 정도면 충분하다.
로랑생은 왜 아폴리네르의 곁을 떠났을까.
왜 다른 남자랑 결혼했을까. 결혼했으면 잘 살지 왜 이혼했을까.
왜 그의 편지를 함께 묻어달라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그녀만 알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 옛사랑을 먼발치에서 보고 싶어 하는 이유를 나만 알고 있듯이.
* 남의 사랑, 한 줄 요약
: 마리 로랑생은 헤어진 연인 아폴리네르에게서 받은 편지를 무덤에 같이 넣어달라고 하고 죽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