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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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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이모 Oct 19. 2017

마음을 보내. 시그널 보내.

남자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2월. 한 살 많은 그녀와 혼인을 한다.

6남 3녀를 낳고 부부로 지내던 두 사람은 남자가 마흔이 되던 해 생이별을 한다.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에 휘말린 남자가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기 때문인데 그 남자의 이름은 정약용. 그 아내의 이름은 홍혜완.


똑똑하다, 지혜롭다는 칭찬을 받으며 귀하게 자란 양쪽 집안의 아들 딸이 어린 나이에 신랑 신부로 만나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고 이제 마흔이 되었으니 한 차원 다른 인생을 시작한다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쓰기를 좋아하며 자녀들의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은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마음은 흐뭇했으리라.  쉰이 넘어 갱년기에 접어들던 무렵에는 남편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라도 필요했을지 모르고, 딸을 시집보내고 허전한 마음에 위로가 되어줄 사람도 남편이었다. 하지만 금슬 좋은 두 사람의 생이별은 생각보다 길었다. 무려 18년.


경기도 광주의 아내와 전남 강진의 남편. 두 사람이 떨어져 지낸 지 몇 년 뒤에 결혼 30주년이 되었을 때, 정약용은 아내가 보낸 선물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짭조름한 밑반찬나 솜을 넣어서 만든 겨울옷 따위가 아니라 치마였다. 분홍치마. 이 치마는 뭐지? 왜 이런 걸 보냈을까. 다른 치마도 아니고 30년 전 시집올 때 아내가 입었던 치마를 보낸 이유를 정약용은 알고 있을까.  

이걸 왜 나한테 주는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선물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묵주 목걸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 내게 그가 왜 그 선물을 했는지 모르겠다. 부활절인가 성탄절을 앞두고 명동성당에 갔던 길에 사 왔다면서 전해준 나무로 만든 묵주 목걸이는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를 떠나겠지만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기도가 묵주의 동그란 나무 알맹이 하나하나에  들어있다고 믿고 싶지만 그건 로맨틱한 이별을 꿈꾸는 내 생각일 뿐이고 그가 왜 묵주 목걸이를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사주고 싶었어"가 그의 대답이었는데, 그러니까 왜 "그냥" 그게 나한테 주고 싶었느냐 이 말이다.  그 사람이 선물을 준 의도를 명확하게는 모르지만 이별을 직감하고 있던 나로서는 슬프게 받아들였던 선물이다.

사진출처 / Pinterest


우리가 선물을 고를 때는 일반적으로 몇 가지의 기준이 있다. 1)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인가 2) 받으면 좋아할 만한 물건인가 3) 의미가 담긴 것인가  등등.  이 중에서 첫 번째 조건은 이 치마 선물과 어울리지 않는다. 유배 중인 남자에게 핑크색 스커트가 왜 필요하겠는가. 강진에서 유명한 갈대축제 때 분홍색 치마를 입고 가장행렬에라도 참여할 게 아니라면 40대 남자에게 그런 치마가 필요 할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받으면 좋아할 물건인가?]에 대한 조건은 충족시킬 수 있어 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의 서프라이즈 선물이 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아내가 보낸 치마 선물은  마지막 조건 [의미가 담긴 선물인가]에 해당된다. 그 치마에 얽힌 둘만의 추억이 있거나, 그 치마를 입은 아내의 모습을  남편이 제일 좋아했다던가.  40대 중반이 된 아내가 그 치마를 고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우체국 택배를 이용해서 오늘 낮에 보내면 내일 오후에 그쪽에서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 인편에  물건을 한번 보내려면 꼬박 몇 달에 걸려야 하던 시절이었으니 신중을 기해서 물건을 골랐을 것이 분명하다. 유배생활 중에 남편에게 다른 여인을 소실로 들여서 홍임이라는 딸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속이 뒤집어져서 경고의 뜻으로 보냈을 거라는 추측도 있긴 한데, 그 치마와 더불어 보낸 짧은 편지에는 이글거리는 질투가 묻어나지 않는다..


때는 병인년 섣달.

세상은 꽁꽁 얼어붙었고 걱정은 깊어갑니다.

당신과 이별한 지 7년.

우리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내는 분홍치마에 어떤 시그널을 담아서 보냈을까. 남편은 그 마음을 알아챘을까.


보고 싶어요.

당신이 필요해요.

책만 읽지 말고 밥 잘 먹고 건강히 잘 지내야 해요.

내 걱정일랑 마세요.

이 치마를 입고 당신의 사람이 되던 그 날처럼  

지금도 당신이 좋아요.


그녀의 분홍치마에는 보고 싶다는 고백과 기다리겠다는 다짐과 잘 지내라는 격려의 시그널이 담겨 있는 게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을 줄 때는 그 안에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오. 특히 여자가 남자에게 보낸 선물은 더더욱. 그러니 부디 그대여 내 마음을 읽어주시게. 얼른 빨리. 롸잇나우.    




* 남의 사랑. 한 줄 요약

: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와서, 결혼 6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 뒤 그의 아내도 눈을 감았다. (유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강진에서 얻은 소실과 딸까지 데려오는 바람에 홍혜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게 아쉬울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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