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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joicewons Oct 14. 2022

산책길에서 만나요

공간 예찬 02. 나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겠지만,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아침 8시에 건물 속에 들어갔다가, 저녁 8시에 건물 밖으로 나오는 하루. 매일, 매주, 매달, 매년 그러한 삶을 반복하면서, 계절이 지나가는 순간들도 아름답게 바라볼 줄 모르고 살았던 때가..


먼 옛일을 회상하듯 했지만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일중독. 일이 좋아서. 내 몸도 내 마음도 돌보지 못하면서 일이 재밌어서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보니 관계와 업무에 지치게 되었다. 돌아보면 평생 일하며 살아갈 텐데, 몇 년 일하다 죽을 사람처럼 달렸던 것 같다. 일하려면 그렇게 일해야지.. 하면서.


크게 앓고 난 후에 깨달음과 변화가 하나둘 생겼다. 천천히, 그리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다스리며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선택한 훈련들, 걸음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이렇게 오전 10시의 햇빛을 누리기도 하고, 조금은 늦은 출근길에 계절이 변하는 순간에 감탄하며 눈에 꼭꼭 담기도 하면서.. 가끔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순간들도 있다.

출근길 우리동네
나의 출근길 뷰 담당 '양화대교, 선유도'
출근길 회사동네
가장 먼저 변화에 반응하는 자연,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 친구들
하늘을 바라보며 살고 있나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 밤 산책.

바깥에서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돌아온 날이면, 집에 와서 바로 녹다운되는 날이 다반사였다.


집에 갔다가 운동하러 나오는 일? 꿈도 못 꾸는 일상이었다.


밤 산책.

달라진 나의 삶에 새롭게 생긴, 저녁 루틴이다.


나에게 산책은 예식이다. 산책에 걸맞은 옷을 입고, 신중하게 그날 날씨를 살피고, 가장 쾌적한 산책로를 선택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 꽃그늘과 이웃집 개와 과묵한 이웃과 버려진 마네킹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돌아온다.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산책은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한다. 산책은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우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라는데,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김영민 칼럼]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이 칼럼을 보자마자, 내가 산책을 꾸준히 하도록 만드는 마음이 바로 이 '목적 없음에서 오는 자유함'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론가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한 운동이 아닌, 오롯이 <산책을 위한 시간>을 가진 후부터는 '내가 나의 몸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고 있다'는 뿌듯한 마음까지 얻었다.


20-30분을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어떤 생각들이 나에게 노크를 한다. 하루를 돌아보며 힘들었던 날은 수고한 나를 토닥이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있던 날은 다시 꺼내어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고,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며 오롯이 바람만 느끼는 날도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라는 과중한 무게를 내려놓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며, 잠잠히 나를 지으신 분과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


나로 존재하는 시간,

나의 산책길에서 만나요.


"그냥 나랑 한가롭게 거니는 거요.
매일  과수원에서 함께 지내는  말이에요. 같이 있으면서 
뭐가  자라고 있는지,
어딜  손봐야 하는지 살펴 주고,
 다음번엔  심어서 자라게 할지 
함께 구상도 하고요.
 당신과 함께 있는  좋아요.
당신 생각도 듣고 싶고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무슨 과일이든
당신 힘으로 키울 필요가 없다는 ...
당신이  일은 내가 당신 땅에서
 일을 하도록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거예요, 과일 생산은  몫이랍니다."

- <내 마음의 과일나무> 중에서

#글쓰는오늘 #나서다 #한걸음 #산책하는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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