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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Jul 07. 2022

지하철을 타면 저는 아수라 백작이 됩니다.

가을을 닮은 사하에게

안녕하세요, 사하님.


푹푹 찌다가도 갑자기 비가 퍼붓는, 완연한 여름이에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날씨가 마치 저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똑 닮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변덕스럽냐면요, 어떤 날은 기분이 극도로 좋아서 길거리에서 춤을 추다가도(물론 적당한 선에서 그칩니다. 엉덩이를 가볍게 흔드는 정도?…) 어떤 날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일기를 써요.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이유란 무엇인가… 혹여나 새벽 감성에 취해 쓴 글을 SNS에 올릴까 봐, 핸드폰은 거실에 봉인해두고 잔답니다.


제 별명 중 하나가 ‘아수라 백작'일 정도로 저는 냉탕과 열탕을 오가면서 사는데요. 그런 저의 아수라 모드가 가장 활발하게 발동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지하철(역)’인데요. 지하철은 마치 작은 사회 같아요. 온갖 일이 다 일어나거든요. 그래서일까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때로는 순식간에 울적해지거나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기도 해요.



최근 서울 잠실에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탄 적이 있어요. 집에서 장장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라 어떻게든 앉아 가고 싶었지만, 일요일 정오 즈음이라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요. 운이 좋게도 자리가 몇 개 남아있더라고요. 냉큼 앉았습니다. 늘 그렇듯이 핸드폰을 들고 각종 SNS를 섭렵하며 가고 있었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보다 보면, 그 바깥의 초점이 흐릿해지면서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거 아세요? 그 기분이 좋아서 저는 종종 지하철을 타면 이어폰을 끼고, 책이나 핸드폰을 보면서 간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앞에 아주 작은 신발이 보이더라고요. 고개를 드니 4살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의 손을 잡은 여성 분이 막 들어와 서 있더군요. 깜짝 놀라 일어서려고 하는데, 혹여나 이미 다른 사람이 이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그래서 그가 엉덩이를 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알량한 마음에 주변을 삭 돌아봤어요. 하지만 모두들 저처럼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죠. 남자아이와 어머니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저뿐인 듯했습니다.


엄마와 아들은 바로 다음 역에서 내렸고, 근처에 서 있던 저는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요. 이번엔 여자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분이 타시더라고요. 이번에도 저는 옆을 돌아봤습니다. 아무도 그들이 탄 줄 모르더군요.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아이고 여기.. 앉으세요"하며 다시 떼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 어정쩡한 자세가 퍽 웃겨서 차라리 아무도 못 본 게 다행이다 싶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묘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모두가 이어폰을 끼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와중에 열차에 불이 나면 어쩌지', ‘바로 옆에서 불법 촬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모르면 어쩌지', ‘누군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으면 어쩌지'… (첫 번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믿으실까요) 그런 생각이 드니 괜스레 기분이 울적해지더라고요. 첫 번째 아수라 모드가 발동한 것이지요.



두 번째 아수라 모드가 발동된 건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어요. 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유독 사람이 많아서 핸드폰을 포기하고 멍하니 서서 가는데요. 다음 역에 도착하는데 문 밖으로 임산부가 보이더라고요. 제 왼쪽 대각선 앞에 임산부 전용 좌석이 있는데, 마침 비어있어서 잘됐다 싶었죠. 문제는 아무도 그분을 못 봤다는 거예요. 전부 이어폰을 낀 채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죠. 심지어 사람들이 그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던 탓에, 정작 당사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었어요(과장 조금 보태면 바리케이드인 줄 알았어요). 비켜달라고 말해도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듣질 못하니, 손으로 가볍게 옆에 있는 사람들을 톡톡 친 다음에 옆을 보라고 알려줬어요. 들어오고 나서 30초 정도가 흐른 뒤에야 그녀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그날은 인류애가 부족했는지 이상하게 짜증이 나더라고요. '이놈의 스마트폰이 문제여 문제'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죠.


언제 한 번은 출구로 걸어가는데, 바로 앞에서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우뚝 서 버린 바람에 부딪칠 뻔했던 적이 있어요. 실제로 부딪친 적도 많고 어깨빵을 당한 일도 많은데요. 그럴 때는 정말 분노를 참기 어려워서 속으로 온갖 욕을 하고 싶어 지는데, “아니야 이러면 너만 기분 더러워져 좋은 생각만 하자~”라면서 애써 억지웃음을 짓기도 해요. 세 번째 아수라 모드가 발동되는 것이지요.


참 웃기죠. 위에서 본인도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쓰고 핸드폰을 본다고 했으면서, 스마트폰 보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게요. 실은 저도 써놓고 놀랐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구나 싶어서요(이런 게 바로 내로남불..?). 잔뜩 화가 나다가도 그들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나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네 번째 아수라 모드가 발동하는 순간이지요.


그렇게 자기모순을 골똘히 생각하며 걷는데, 눈앞에 이런 광경이 펼쳐지더군요. 5호선을 타고 영등포 구청역에서 내리면, 출구로 가는 길에 계단이 하나 있는데요. 계단 한쪽에서 지지대를 잡고 올라가던 할머니의 짐을, 뒤에서 올라가던 남성 분이 들어주더라고요. 뻔하고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뻔한 선의들 덕분에 인류가 아직까지 망하지 않은 거 아니겠어요. 누군가의 선의를 발견하는 건 봐도 봐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급작스레 제 감정이 바뀐 걸 보니 또 아수라 백작이 됐지요?


한껏 기분이 좋다가도, 엘리베이터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유아차나 캐리어가 맨 뒤에 서 있는 걸 보고는 다시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해요.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다가 가운데 사람 양옆으로 자리가 났을 때, 앉아있던 분이 옆으로 비켜주는 순간은 감동으로 다가오죠. 반대로 옆 칸에서 비명이나 고성이 들리면 심장이 철렁하고요.


지하철은 다양한 관계가 스쳐가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는 곳인지라 항상 긴장하며 타게 돼요. 소소한 선의와 사소한 불편과 은근한 공포가 공존하는, 그래서 마치 작은 사회 같은 곳이지요. 그곳에서 저는 기분이 좋았다가 슬펐다가. 기뻤다가 화났다가. 부끄럽다가 몽글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저한테 아수라 백작 같은 면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지하철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기쁨과 슬픔, 환희와 분노,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모순까지. 모두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지난 편지에서 사하가 말했죠. 착해지지 말고 자유로워지자고요. 착해지지 말자는 사하의 말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곱씹어 보았어요. 나에게 있어 착해지지 말자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할까. 생각해보면 저에게 자유는 ‘해방'에서 오더라고요. 착하지 않은 나, 이상한 나, 찌질한 나, 아수라 백작 같은 나를 세상에 드러내고 해방시키는 거요.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꽁꽁 싸매고 감추고 착한 모습만 드러내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 편지에서는 저의 이중적이고도 변덕스런 모습을 보여드렸는데요.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후련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하 덕분에 편지를 쓸 때마다 남몰래 품고 있던 취약함과, 실패와, 착하지 않은 말들을 살며시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두 번째 편지에서 말했듯, 저는 인권을 공부하면서도 정작 장애인을 마주했을 때 몸이 굳어서 민폐를 끼친 적이 있다고 했지요. 또 여섯 번째 편지에서 말했듯, 사랑해야 마땅한 가족들이 가끔은 사무치게 싫다고도 했고요. 오늘 편지에서는 어린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려다가도, 막상 누군가 먼저 엉덩이를 떼진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알량한 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본인도 못지않게 스마트폰 중독자면서, 핸드폰을 보며 걸어가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지요.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이런 저의 솔직함이 어쩌면 사하에겐 곤혹스러운 짐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의 ‘덜 착한’ 이야기는 어디까지 사하에게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느 정도의 취약함까지 받아들이고, 보듬어줄 수 있을까요? 사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볼 편지의 완성을 위해 지워야 했던 말들을 보고 있으면, 자유라는 것이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또다시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네요. 이번 여름은 저를 닮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2022년 7월 7일


키키 드림.




*추신 : ‘가을을 닮은 사하에게'라는 부제가 무슨 말인지 궁금하실 텐데요. 첫 문단을 적다가 문득, 사하는 어떤 계절과 가까울까 생각을 하다가 가을이 떠올랐어요. 가능한 많은 이들을 보듬으려는 다정한 마음이 풍요로운 가을을 닮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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