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가 본 희생, 마네가 본 침묵, 피카소가 본 공포, 그리고 들라크루아
역사는 강력한 이미지에 의해 기억되고, 예술은 때때로 역사를 바꾸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외롭게 죽은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는 위엄있는 영웅의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며, 역시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은 혁명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유명한 그림 속 한 여인이 혁명의 깃발을 들고 군중을 이끌고 있다. 그녀가 쓰고 있는 붉은색의 모자가 눈에 띈다. 이 '프리기아' 모자는 고대 로마에서 노예가 해방되어 자유민의 신분을 얻게 되면 쓰던 모자로,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를 상징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프리기아 모자는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쓰이게 되었다.
어릴 적 보았던 『해리포터』의 집요정 도비가 ‘옷’을 선물받고 자유를 얻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왜 하필 옷일까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 역시 자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서양 미술에서 벌거벗은 여성이 등장하면 이는 주로 그리스 로마 신화속의 여신인 경우가 많은데, 그림에서 깃발을 들고 선 여성은 ‘마리안(Marianne)’으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존재다. 마치 엉클 샘(Uncle Sam)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처럼, 마리안은 혁명 정신을 상징하는 프랑스의 얼굴이 되었다.
이 작품은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그 혁명이 아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부르봉 왕조의 샤를 10세에 맞서 들고 일어나 파리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왕립군과 싸웠으며, 결국 왕을 퇴위시키고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당시 일부 비평가들이 자유의 여신의 묘사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그녀의 피부색이 너무 거칠게 묘사되었고, 겨드랑이 털이 보인다는 등의 비판 요소들이 오히려 혁명의 열기와 현실감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 그림은 이후 수많은 혁명과 저항 운동에서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공화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콜드플레이의 앨범 'Viva La Vida'의 커버아트로도 많이 알려져있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The Third of May 1808, 1814)은 예술이 어떻게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1808년 5월 3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프랑스군의 학살을 담고 있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 점령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처형했고, 고야는 이를 강렬한 명암 대비와 감정적인 표현을 통해 기록했다.
그림의 중심에 선 흰 셔츠를 입은 남성은 두 팔을 벌리고 있는데,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며 희생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으며, 곧 총살당할 운명이다. 반면, 프랑스군은 얼굴이 보이지 않게 묘사되어 무자비한 기계적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도 약 50년이 지난 후 이와 비슷한 주제와 구도의 처형 장면을 그려내었는데, 이번엔 프랑스 제2제국의 정치적 실수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나폴레옹 3세 황제는 프랑스의 속국 격이었던 멕시코의 황제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옹립했다. 하지만 충분한 물적,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던 나폴레옹 3세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고, 멕시코인들 역시 자신들과 아무 연관이 없는 허수아비 황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1세는 권좌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민중에게 끌려 내려와 총살당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실제와는 다르게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멕시코 군복이 아닌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그려냈는데, 공화주의자였던 마네가 마치 “이게 지금 프랑스가 하고 있는 짓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마네의 그림은 고야의 작품과 의도적으로 유사하다. 병사들은 똑같이 화면 오른쪽에서일렬로 늘어서 총을 겨누고 있고, 희생자는 왼쪽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고야와 달리 마네의 화면은 더 평면적이고 덤덤하다. 고야가 격정적으로 비극을 외쳤다면, 마네는 차갑게 사회를 비판한다.
고야의 작품은 단순한 전쟁 기록을 넘어, 억압받는 민중과 폭력적인 권력의 대립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았다. 이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예술 작품의 원형이 되었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비롯한 수많은 저항 예술에 영향을 주었다.
들라크루아의 마리안이 자유를 상징했다면, 고야는 민중의 비극을, 마네는 국가의 위선을, 그리고 피카소는 전쟁의 공포를 고발했다. 이 세 사람의 그림은 단순한 시각 예술을 넘어, 저항의 역사를 구축하는 힘을 가졌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다. 때로는 정치보다 앞서 진실을 외치고, 총보다 강하게 고발하며, 기억보다 오래 남는 기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