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바닥 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눈가리개를 한 채 무릎 꿇는다. 손끝은 허공을 더듬고, 그녀의 앞에는 도끼가 기다리고 있다. 긴 머리와 흰 피부가 빛나는 그녀를 보고 처음엔 신화 속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여주인공일까 싶었다.
파란만장한 영국사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대목 중 하나는 여섯명의 아내를 두고 두번의 이혼, 두 명의 아내를 처형한 헨리 8세의 이야기일 것이다. 한 세대 뒤의 블러디 메리, 국가와 결혼했다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이야기까지 재미있고 다사다난한 이야기가 많은데, 제인 그레이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 9일이라는 시간을 차지한다. 그녀는 9일 동안 영국의 여왕으로 군림했지만, 그 짧은 재위만으로는 그녀의 비극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정치적 욕망에 사로잡힌 부모, 그리고 종교 전쟁의 한복판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희생자’가 된 인물이었다.
제인은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외손녀로, 교양 있고 총명한 귀족 소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계산 위에 올려졌다. 제인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 공작과 장인 존 더들리(당시 실세였던 권력자)는 에드워드 6세가 병약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제인을 차기 여왕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처럼 성공회(영국 국교회)를 지키는 독실한 신자였고,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였던 이복누이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 가톨릭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다. 특히 헨리 8세 치하에서 성공회로 전향했던 귀족들은 가톨릭 복귀 시 보복을 두려워했고, 이 때문에 개신교 신앙이 확고한 제인을 ‘안전한 대안’으로 지목한 것이다. 결국 에드워드는 유언을 통해 제인을 후계자로 지정했고, 제인은 뜻하지 않게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재위는 민심과 의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가장 비극적인 여왕으로 남게 된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으로보면 3위이니, 1위인 메리와 2위인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는 왕위 계승은 먼 이야기였다. 더구나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비공식적 절차였기 때문에 'Queen'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식 칭호는 'Lady' Jane Grey 이다.)
제인 그레이가 처형되기 전, 메리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어릴 때부터 아껴왔던 친척 여동생이고 어른들의 정치 싸움에 휘말린 착한 동생이 불쌍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고수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단순한 정치적 희생을 넘어서, 자신이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캔버스 위, 밝은 빛에 싸인 제인은 하얀 드레스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순교자처럼 보인다. 그녀를 붙잡고 울부짖는 시녀들, 뒤편에서 무표정하게 지켜보는 수행원들, 도끼를 움켜쥔 채 망설이는 집행인의 모습이 긴장감을 더한다.
극적인 명암 대비(키아로스쿠로) 기법은 제인의 순백색과 주변의 어둠을 날카롭게 대조시켜, 그녀가 처한 운명의 부조리함을 강조한다. 그림 속에서 제인의 얼굴은 평온하게 보이지만, 배경의 어두운 분위기와 대비되는 밝은 빛은 제인의 마지막 순간의 신앙적 결단을 강조한다. 그녀의 순수한 흰 드레스는 신앙과 순결을 상징하며,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모습은 그녀가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고, 오직 신에 의지하려는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작품은 제인 그레이의 비극적이고도 숭고한 마지막 순간을 기념하는 의미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왕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는 것은 단지 권력이 무너졌다는 상징을 넘어, 신이 부여한 절대 권위가 인간의 손에 의해 무너졌다는 충격을 안긴다. 영국에서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찰스 1세다. 그는 한 때 신의 대리인이라 여겨졌던 왕권의 상징이었지만, 그 신념과 권위가 시대와 충돌하며 역사의 가장 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찰스 1세는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처형당한 군주이자, 한동안이지만 군주제의 폐지를 불러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난 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통합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찰스 1세는 1625년 왕위에 오른 후 전제적 통치를 추구했으나 잉글랜드 귀족과 의회는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에게 호락호락 복종하지 않았다. 찰스 1세에게는 의회를 억누를 만큼의 정치적 기반이나 군사적 역량이 미비했지만 본인은 이를 잘 몰랐던 듯하다
위 작품은 찰스 1세의 처형 장면을 중심으로, 좌측 상단에는 재판을 받는 모습, 하단에는 단두대로 향하는 장면, 우측에는 처형 직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1649년 1월, 화이트홀에서의 처형 장면을 묘사하며 당시의 목격자 증언과 판화 등을 바탕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한 때는 신의 아들로 여겨지며 절대 권력을 누리던 영국의 왕이 시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리다니! 당시 한국은 조선 왕조의 인조 시기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왕의 목을 쳤다는 사실이 정말 센세이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 다이크가 그린 찰스 1세의 초상은 단순한 왕의 그림을 넘어, 당시 군주가 지향했던 권위의 이상형을 시각화한 대표작이다. 근육질의 말 위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찰스의 모습은 리더십과 절대 권력을 상징한다. 관객을 응시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는 고고한 시선은 그의 위엄을 드러내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은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알고 봐서일까, 우람한 말 위에 올라 타 있는 찰스의 뾰족한 얼굴과 갸름한 체구는 위엄보다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외로운 인상을 준다. 아무리 선전에 능한 반 다이크였어도, 소심하고 내성적인 찰스의 본모습까지는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반 다이크는 오히려 그것을 은근히 드러냄으로써 왕의 초상화에 인간적인 깊이를 부여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권위와 품격을 과시하지만, 그 속에는 시대의 불안과 통치자의 고독이 스며 있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단순한 궁정 초상을 넘어, 찰스 1세라는 인물의 역설적인 자화상이자, 몰락해 가는 왕권의 운명을 예감케 하는 예술적 암시처럼 느껴진다.
그는 왕으로서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지만, 민심을 얻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국민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최초의 영국 국왕이 되었다. 말의 든든한 갈기와 근육은 여전히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그 위의 왕은 더 이상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몰락을 향해 달려가는 고독한 인물처럼 보인다. 반 다이크의 그림은 찰스 1세의 이상과 현실, 권위와 몰락이 교차하는 왕권의 역설적인 초상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