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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개의 인간 Mar 31. 2022

잔치국수

애호[愛好]하는 애호박

전날 새벽 3시가 다 되어 일을 마쳤다. 휴지를 물에 풀어놓은 것처럼 힘없이 흩어져버린 몸을 주섬주섬 챙겨 자려고 누웠지만 잠을 자는 것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요즘에는 운이 좋게 제시간에 잠이 들어도 자면서도 일을 하는 기분이다. 아니 맘 편히 자는 것도 하나의 일이 되어버린 일상이랄까.


창문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잠을 깨고 무거운 아침을 맞이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는 고심해 메뉴를 고를 필요 없이 곧바로 국수를 끓인다. 잔치국수는 어렸을 적에는 등한시하다가 크면서 좋아하게 된 음식 중 하나인데 요리하는데 손이 많이 가지 않아 간단하고 맛도 일품이다. 나이가 들면 입맛이 변한다고 하던데 20대 때는 화려한 미식으로 화룡점정을 찍는 음식이 좋았다면 30대인 지금은 투박하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음식이 맘에 든다.


우선 큰 냄비에 물을 채워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린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멸치 한 움큼을 집어 다시마 한 장과 함께 넣어 육수를 내고 미리 채 썰어 놓은 양파와 애호박을 넣어준다. 마무리로 계란을 풀어 넣은 다음 육수가 다 끓으면 한편에 놓고 국수를 삶는다. 국수가 끓어오를 때쯤 찬물 반 컵을 넣어 1-2분 이 지난 후 흐르는 찬물에 삶은 국수를 씻어낸다.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장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고명도 따로 필요 없다.


육수를 끓일 때 당근이나 감자 버섯 등 기호에 맞춰 채소를 더 넣을 수도 있지만, 내 입맛엔 애호박 만한 게 없는 것 같다. 애호박을 조리하면 수분과 함께 은은한 단맛이 흐르기 때문에 설탕을 따로 넣거나 다른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예전에는 가격이 저렴한 데다 영양가도 높아 부담 없이 식탁에 올랐지만, 몇 년 새 안정되지 않은 물가에 따라 채소 물가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애호박 하나에 저렴하게 사면 990원부터 비싸게는 3천 원이 넘어가서 제철인 여름에도 한동안은 비싸서 선뜻 장바구니에 넣기가 어려웠다.


가격이 저렴할 때 많이 사 와 냉장고에 저장해 놓고 요리할 때마다 꺼내어 사용해도 되지만 손질을 따로 해놓을 만큼 부지런하지 못한 탓에 마트에 가는 날에 운이 좋게 가격이 내린 애호박을 발견하면 한 두 개 집어 오는 것이 다다. 어쩌다 이렇게 귀하신 몸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애호하는 애호박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는 일이 바쁜 날에는 밥때를 놓치기 일수다. 식사시간에 온 신경에 촉을 세우지 않는 한 제때 밥을 잘 챙겨 먹기란 정말 어렵다. 어쩌다 일이 한꺼번에 몰리는 날이면 밥을 하고 차리는 시간마저 사치로 느껴질 때가 있어서 두유 혹은 과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지나갈 때도 있다. 최근 몇 년간 배달문화가 빠르게 발달하여, 일하는 도중에 나와 식당에 가야 하는 수고스러움과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었고, 주문이 몰리는 점심때를 제외하고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않은 자리에서 식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배달음식을 자주 접하는 날이 늘수록 몸은 간편하나 속은 전쟁이었다. 건강하지 않은 식생활로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고 강한 맛과 조미료가 가득한 음식이 몸에 축적될수록 삶의 질도 낮아졌다. 몸과 마음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하루에 한 끼라도 집에서 꼭 요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속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이렇게 따뜻한 잔치국수를 한 그릇 먹고 나면 내 몸을 잘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채소는 애호박과 양파가 전부인 다소 삼삼한 멸치국물이지만 강한 맛으로 무장한 배달음식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던 혀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입안에 여유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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