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내가 나를 향해 꽂고 있는 화살을 막고 있다
다음 날 아침 눈이 퉁퉁 부어서 일어났다. K는 휴가 때 내려 먹으려고 챙겼던 커피를 꺼내어 커피를 내린다. “아까 일어나서 사진 찍었는데 볼래요?”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가누는 내 옆에 붙어 L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사진을 보여준다. “예쁘다.” L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갈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데 보통 일출이나 일몰 사진을 자주 찍는 것 같다. 밤새 모여 수다를 떨고 새벽에 잠이 들어도 잠에 취약한 나와 K와는 달리 L은 일출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K가 내린 커피를 컵에 담아 식탁 앞에 앉았다. 비어있던 집은 사람의 온기 말고는 채워진 게 없었다. “배고프다.” 내가 말했다. “일단 준비하고 밖으로 나가서 밥을 먹자.” K가 말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몸을 다시 이불 위로 눕혔다. 우리 모두 실행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L은 침대 위로 올라가 책을 펴고 K는 핸드폰을 켰다. 나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나체인 상태로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끔찍하다.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고 단언했던 사람에게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 절대라는 건 없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할 수 없는 일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내 안에 불신이 싹을 틔웠다. 머리를 감고 나와 수건으로 몸에 물기를 닦으면서도 생각했다. “설마, 아닐 거야.” A에 대한 애증이었다.
밖으로 나와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집 앞에 있는 소바 집으로 갔다. 이 동네로 이사를 하고 일하는 중간중간 틈이 날 때마다 근처 식당을 돌았다.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목적도 있지만 누군가 이곳을 방문하면 자신 있게 데려갈 식당 하나쯤은 알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이 소바 집도 그중에 하나로 L이 부산에 오면 데려가야지 하고 눈여겨보던 곳이다. 내가 다른 나라와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갈 때면 그곳에 친구들은 본인들이 알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곳으로 날 데려갔다. 친구들은 식당을 갈 때마다 “네가 좋아할 거야”라고 말을 한다. 맛도 맛이지만 나의 취향을 미리 알고 존중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종의 이 사람만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로컬들에게 입소문이 자자했던 이곳은 밥때가 되면 항상 사람들이 줄을 서지만 빠른 회전율로 기다리다 지쳐서 맛에 실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운이 좋았다. 우리는 바로 테이블을 잡을 수 있었다. 메뉴도 몇 개 없는 이곳은 주문한 즉시 음식이 나온다. “아, 속이 안 좋아” 내가 말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앓고 있는 나는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소화를 잘 못한다. 심할 땐 구토를 하거나 장이 꼬여서 응급실을 가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와 K는 잠시 차를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고 나와 L은 나의 또 다른 친구가 일하고 있는 카페로 걸어갔다.
부산에 와서 친해지게 된 친구 L이다. 3주 만에 얼굴을 보는 듯하다. 며칠 전 L과 통화를 했다.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되어 전화했다는 L에게 짧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 사람이 나쁜 거야.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없어.” 통화를 마치기 전 L의 마지막 말이었다. 밖으로 커피를 들고 나와 잠시 L과 대화를 나눴다. “너 괜찮아? 신고해. 그냥 두면 안 돼.” L이 말했다. “싸워도 내가 기운이 있어야 싸우지. 지금은 내가 지칠 대로 지쳐서 그게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없어.” 담담한 내 답에 L이 말했다. ‘그래. 일단 너부터 괜찮아진 다음에 생각해보자.” 모두가 내 걱정을 한다.
누구도 내 잘못이라고 탓하지 않는다. 단지 상황이 그런 거라고 그 사람이 잘못된 거라고 말한다. 모두가 내가 나를 향해 꽂고 있는 화살을 막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