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을 만들기도 타오르는 불신을 덮기도 한다
대화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책을 읽고 있는 L에게 횡설수설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꿈 아니에요. 현실이에요.” L은 문제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보고 해결책을 찾는다. 난 L의 이 부분이 좋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난 후 차를 마시며 L에게 물었다. “넌 캐나다가 왜 좋았어?” “문제를 방관하지 않아서요. 사람이라면 누구든 문제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개인적인 일도 있고 집안 일도 있고 사람 사는 데는 다 문제가 있어요. 한국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부터 외면을 하고 문제가 있으면 그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이 되잖아요. 캐나다에서는 일상에서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생기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어요. 듣는 사람에 반응도 크지 않아요. 일어났던 상황을 그대로 판단하고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내가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점이 좋았어요. “언니는요?” L이 물었다. “너와 같은 결로 자기 자신에 대해 기만하지 않아서. 타인과 다른 것을 인정하고 다르다고 이상하게 보지 않고 같아지려고 하지 않는 점이 가장 좋았어.” 반대로 지금 내가 전체적으로 한국에 있는 것이 힘든 점도 이런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기만하는 것, 타인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 그래서 모두가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보통인 일상이 가끔은 숨이 막힌다.
“언니 지금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L이 말했다. “그냥 계속 소리 지르고 욕 하고 싶어.” “나가서 하고 싶어요? 언니 하고 싶으면 해도 돼요. 제가 옆에 있어줄게요.” 말의 힘이란 크다. 한 순간에 불신을 만들기도 타오르는 불신을 덮기도 한다. 핸드폰을 보니 그 사이 K에게서 한 통의 부재중이 찍혔다. L은 K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장을 보러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미 와서 주차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L과 나는 짐을 챙겨 백화점으로 걸어갔다. “담배 한 대 피고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 나는 코너를 돌아 흡연장소로 왔다. 가방에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우면서 읊조렸다. ‘사라지고 싶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와 K와 L이 기다리고 있는 8층에 도착했다. 내 집에 없는 가전제품을 보러 왔다. 자취 생활을 오래 한 K는 사용할 때에 불필요한 것과 필요한 것을 잘 구분한다. 커피포트 하나를 고르는 데에도 유리인지, 플라스틱인지 내구성을 꼼꼼히 살핀다. “이게 좋겠다. 안에 차도 끓여 마실 수 있겠네. 분리도 되니까 세척하기도 편하고 유리라서 좋다.” “그래. 이걸로 하자” 박스를 들고 우리는 매장을 좀 더 둘러봤다. “믹서기도 사야 돼.” 내가 말했다. “믹서기는 돈 좀 더 주고 필립스나 테팔 같이 이름 있는 걸로 사. 저렴한 거 사면 날이 빨리 부러지고 고장이 잘나.” 우리는 다른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K는 구간을 지날 때마다 세탁기, 냉장고, 식탁, 침대 등 집안에 새로 들어갈 것들을 살피었다. 월세 10년 살이 K는 전세 대출을 해서 이자를 갚는 돈이 월세로 나가는 돈보다 이득이라는 점을 알고 난 후 집을 보러 다니고 있다. 이제 막 월세살이를 시작한 나로서는 까마득한 일이다. 내 집에 내가 번 돈으로 필요한 가전제품을 사고 집을 꾸민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각국을 돌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나에게 상상도 못 할 일이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커피포트와 믹서기를 한 박스씩 양쪽 손에 나눠 들고 장을 보러 지하 매장으로 내려갔다.
와인 파는 코너에서 잠시 멈췄다. A가 생각난다. 주말 저녁이 되면 A와 함께 요리를 하고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봤다. “저녁에 와인 먹자.” 내가 말했다. “아, 집에 와인 잔이 없어. 내가 올라가서 사 올게” 나는 K에게 짐을 맡기고 다시 8층으로 올라갔다. 부산에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지 1개월 없는 살림살이를 채우느라 이곳에 자주 왔다. A와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엔 꼭 이곳에 들려 그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