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때로는 삶의 구렁텅이에서 버둥거릴 수 있는 한 개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완벽하지 못해도 그게 최선이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
_김수현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中
연애가 끝났다. A의 흔적을 멀리하고 싶었다. 일과 여름휴가를 핑계로 집을 떠났다. 휴가 계획이 틀어져 친구들과 나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날 남아있던 A의 물건이 사라졌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A는 물건을 정리해서 떠났다. 문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 순간 내 집에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들어오고 나간 것이 겁이 났다. A는 내게 더 이상 연인이 아닌 낯선 사람이 되어있었다. A에게 문자를 보냈다. A는 답이 없었다. A가 다녀갔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혹시 모를 자칫 범죄로 번질 수 있는 온갖 일들이 상상이 되어 손과 발이 파르르 떨렸다. “언니. 일단 비밀번호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L이 말했다. 어쩌면 사람을 믿는다는 건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겠다. “일단 번호부터 바꿔.” K가 말했다. “그래. 나 좀 도와줘.”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집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번호를 바꾸고 집안을 배회했다. 나만의 공간이 불안과 공포로 휩싸였다. 난 이제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분노, 두려움, 슬픔, 체념 순서대로 감정이 교차한다. K와 L에 이부자리를 준비하다 비에 젖어 있는 매트리스를 발견했다. 욕실로 걸어가 수건을 꺼냈다. 매트리스에 물을 닦아 내면서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스스로도 놀란 나머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였다 잠시 후 L은 휴지를 가져와 손바닥으로 원을 그리며 내 등을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L이 말했다.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그 사이 K는 아무 미동 없이 밀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울음이 그칠 무렵 K는 설거지를 마쳤다.
우리는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으로 먹을 배달음식을 골랐다. “중국음식 어때?” 상황이 혼란스러운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L이 말했다. “언니. 신고해요.” 불안과 초초함에 떠는 나와는 다른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짧은 소동으로 한풀 꺾인 불안감이 다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음식을 접시에 덜면서 고인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래. 한국에 못 있겠어” 내가 말했다. 이어 L이 웃으면서 K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친구를 잃었습니다.” L의 말로 무거운 분위기를 달랜다. 지금까지 큰 반응이 없던 K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걔가 이런 행동을 하면 너의 가치가 떨어져?” “안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걸로 너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야?” “네가 돌연 다 포기하고 떠날 만큼 걔가 너보다 중요해? “너는 그냥 너야 걔가 뭘 하든지 간에 넌 그냥 너라고.” 맞는 말만 골라하는 K의 앞에서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상실감은 거대했다. 거대했지만, 매울 길이 없다는 것을 하루코는 알고 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고 하루코는 생각하고 있다. 상실감은 그저 여기에 ‘있을’뿐이지 그저 얽매 이거나 빠질 필요는 없다.
_에쿠니 가오리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中
저녁을 먹고 우리는 각자의 일을 했다. L은 샤워를 하고 K는 식탁에 앉아 일을 하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언니. 여기로 와봐.” 침대 위로 K를 불렀다. 평소 같으면 “네가 와”라고 퉁명스럽게 받아칠 상황인데 K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와서 누웠다. K의 어깨와 매트리스 사이에 얼굴을 넣어 비집었다. 늦은 새벽 K의 어깨에 기대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않고 쏟아냈다. 그동안 나 스스로 지지 않겠다고 단단하게 세웠던 내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이대로 푹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