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던 밤

나는 어둠 속을 걷고 또 걸었다.

by 일개의 인간

세 여자의 결핍을 채우기에 밤은 너무 짧았다. 다음 날 아침 L이 부산을 떠나는 날이다. 폭우로 인해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공지가 뜬 것을 보고 L은 전화 걸기에 바빴다. 나는 회사 일을 걱정하는 L을 보면서 돌아가지 못하게 더 많은 비가 내리기를 속으로 빌었다. 잠시 후 L이 타고 갈 KTX는 운행에 차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못내 아쉬워했다. 열차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 짐을 챙겨 K와 L을 따라 내려갔다. K와 L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동안 나는 벤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이들이 돌아가고 없는 텅 빈 오피스텔에 홀로 남을 내가 그려졌다. A와 헤어지고 난 일상을 놓았다. 비단 A와의 문제뿐 만은 아니었다. 일, 부모와의 관계, 연애 모든 게 수틀렸다. 작은 불씨가 걷잡을 수도 없이 번져버린 산불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연기에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악몽의 날들이 이어졌고 나의 일상은 하나의 패를 쓰러트리면 차례로 쓰러지는 도미노 게임처럼 좌르르 무너졌다.


L과 포옹을 하며 인사를 했다. “올라가면 전화해” “데려다주고 전화할게 청소하고 있어. 목욕탕이나 가자” K가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왔다. 집안으로 들어온 순간 공허가 나를 반긴다.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책상 위에 놓고 바닥에 누웠다.


A와의 마지막 날이 떠오른다. 그날 밤은 늦게까지 A와 함께했다. 논리도 이해도 없는 이기적인 각자의 입장만을 대변하면서 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난 데려준다는 그 애를 뿌리치고 이전에 미리 지인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인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늦은 밤 홀로 걷는 내내 인기척 하나 없는 텅 빈 거리가 두렵고 무서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걷기부터 시작한 내가 무모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길바닥에 털썩 주저 않아 핸드폰을 켜고 위치를 확인했다. 연락이 안 되는 내가 걱정이 되었던 지인들에게서 어디냐는 문자가 쏟아졌다. 바로 위치를 찍어서 데리러 와 줄 수 있냐고 문자를 보냈다. 발바닥이 시큰거려 신발을 벗었다. 발 곳곳에는 물집이 잡히고 뒤꿈치가 까지고 벌게져서 피가 흘러 굳어있었다. 덜컥 밀려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아픈지도 모르고 걸었다.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K가 왔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무슨 일이야’ 하고 물어보는 K에게 걷고 싶어서 걷다가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K는 도착하기 전까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일전에 트위터에서 본 ‘어른의 대화’였다. 많은 어른의 공통점은, 묻지 말아야 할 때 묻지 않으며 기다림이 필요할 때 기다려 주는 것이라고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을 때나 지금 내뱉는 말이 진심은 결코 아닐 때. 그럴 때 어른은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며 기다려 주는 침묵의 대화법. 산속에 일찍 자리를 잡고 캠핑을 즐기고 있던 K는 차에 있는 담요를 꺼내어 내게 덮어주며 작은 플라스틱 컵에 소주 한잔을 건네주었다.


술을 마시고 텐트 안으로 들어와 몸을 눕혔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자려했지만 결국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후 아침 풍경은 하얀 안개가 산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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