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건 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안쓰럽고 애틋하다.

by 일개의 인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 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_김영하 ‘보다’ 中


아만다와 통화를 마치고 잠시 사색에 잠겼다. “나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한국생활이 고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이 잘 풀릴 땐 적당히 벌이도 괜찮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쫓기지 않는 생활을 한다. 단조롭지만 치열하다.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가까이 살고, 힘들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고된 마음을 내려놓고 울 수 있는 친구들도 여럿 있다. 깊은 연대를 하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도 있다. 환경적으로 멀리 나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바다가 있고 산도 있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자주 우울하고 슬퍼한다.


생각 끝에는 결과가 남지 않는다. 이럴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이불을 개고 밖으로 나가 카펫을 털고 걸레를 집었다. 바닥을 닦고 화장실로 향했다. 바닥에 끼인 물때를 솔로 박박 닦아서 물로 흘려보냈다. 화장실 청소는 원 플러스 원으로 나온 가성비 좋은 제품 소비와 같다. 더러운 것을 닦아내고 씻기고 나면 내 안에 담아 둔 쓸모없는 것들도 같이 씻겨서 하수구 밑으로 떠내려 가는 기분이다.


청소로 땀을 내고 씻고 에어컨 밑에 누웠다. ‘하_살 것 같다.” K에게서 문자가 왔다. “출발한다. 10분 후에 집 앞으로 나와.” 책상에 걸쳐놓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밑으로 내려갔다. 담배 한 대를 다 필 때쯤 K의 차가 도착한다. “아, 배고프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K가 말했다. “뭐 먹을 건데?” “밀면.” 혼자 있을 땐 탈이 자주 나는 탓에 밀가루 음식은 되도록이면 피하지만 철근도 씹어서 소화를 할 수 있을 만한 위대한 장을 가진 K덕에 가끔 밀면을 특식으로 먹게 된다.


점심을 먹고 나와 카페로 갔다.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A가 생각나.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어.” 내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건 너지. 이미 지나간 일을 계속 곱씹어서 뭐해. 도움이 안돼.” K앞에서 지나간 연인의 일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금기어를 내뱉는 거와 다름없었다. “연애를 10년 하고 나니까 헤어질 땐 아무 느낌이 없었어. 이제는 생각나는 것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고 그리운 것도 없고 마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K가 말했다. 10년의 세월이 이렇게 잊히기도 하는 걸까.


“근데, 헤어지고 1년쯤 지나고 보니까 그 시절 나를 좋아했던 남자애는 계속 기억에 남더라. 그때 나는 관심도 없었고, 누구를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일단 사람을 대하는 법을 몰라서 관계에 서툴렀던 시절이었어.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그 애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걸까_는 잘 모르겠는데 이유 없이 기억에 남더라고. 그래서 연락해서 두 번 인가 봤는데 걔도 나도 그때에 우리가 아니었어. 내가 기억하는 그 애는 사라졌고, 그 애가 좋아했던 나도 지금은 없는 거지.”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을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 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_ 김소연, ‘마음 사전’ 中


나는 A를 A 자신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장 깊이 A를 오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오해’ 하고 싶은 A의 단면만 보고 그를 떠올리는 건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신의 선택과 두 사람 간에 동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