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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Dec 14. 2022

사탕 굴려 먹듯 감정 굴려 먹기

‘화’의 이면

아침 알람이 필요 없는 우리 집. 아이의 몸속에는 모닝콜 알람이 탑재되어 있기라도 하는 듯 거의 비슷한 시각에 기상한다. 6시가 조금 안 된 아침은 여느 보통날과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오늘부터 남편의 도시락을 싸주기로 했다는 것. 가만히 있어도 바쁘게만 돌아가는 아침 시간. 최대한 간편하게 준비할 수 있는 메뉴를 고르고 골라서 도시락을 싸고 설거지까지 마쳤다. 내가 남편 도시락을 다 싸다니. 나는 별말 없이 도시락을 건넸지만 속으로는 으쓱하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의 일정은 3시에 마친다고 했으니, 아이와 2시 30분 정도까지 신나게 놀다가 남편을 데리러 갈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자, 아빠도 학교로 갔으니 이제 한번 신나게 놀아 보자! 역할놀이를 하고 끼니와 간식 챙겨 먹기, 그리고 간단한 뒷정리. 쉼 없는 대화와 말장난이 오가는 속에 두통은 없었다. 그래, 오늘은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날이군. 그 어느 때보다 속이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있고, 아픈 곳도 없고. 그저 평범하기만 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2시 50분 경이되었고 아이를 차에 태워 시동을 걸었다. 남편의 오피스 빌딩과 집의 거리는 꽤 가까워서, 정확히 9분 뒤 픽업 장소로 도착했다. 그러나 핸드폰은 조용했다. 운전이 아직 미숙한 나는 갑자기 초조해졌다. 왜 핸드폰을 아직 안 보는 거지? 조금 더 늦게 끝나는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그런 말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남편이 일하는 빌딩 앞은 공식적으로 주차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일방통행 길 끝자락에 차를 잠시 대고 있으면 남편이 차에 바로 타고 얼른 목적지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에 남편이 연락도 없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불안해지더니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화’가 내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잠시 정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한 블록을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시간을 보냈다. 3시 8분. 남편의 세미나가 조금 늦게 끝났다며 이제 건물 앞으로 내려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블록을 빙빙 돌면서 ‘화’는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솜사탕처럼 덩치가 계속 부풀고 있었고 그것이 최고조에 다 달았을 때 남편은 차에 탔다.


나는 차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왜 이렇게 늦었어?’ 물었고, 내가 이렇게 화가 나있을 줄 몰랐던 남편은 ‘세미나라는 게 원래 이렇게 조금 늦게 끝날 수도 있는 거야.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했다. 나는 그의 첫마디가 ‘미안해’가 아닌 것에 더 큰 화가 났다.


‘뭐? 세. 미. 나.라는 거?’


이렇게 언성을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아이는 우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입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입에 지퍼를 닫고는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그리고 아이를 재울 때까지도 남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절대 가시지 않을 것 같았던 ‘화’가 시간이 갈수록 누그러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쟤는 왜 그러지’에서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의 전환이 일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 감정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사탕을 굴려 천천히 녹여 먹듯이, 내 안에서 피었던 감정을 살살 굴려보았다. 화가 나면 화를 냈다가 이내 반성을 했다가 어쩐지 조금 억울해하기도 하다가. 그렇게 끄집어내고 나니 다 걸러지고 남는 감정이 있었다. 그게 바로 내 ‘화’의 근원이었다.


가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정 상황에 이상하리만치 화가 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상황은 특별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감정을 가만히 두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났던 거지? 왜 이게 불편했지? 난 무엇을 바랐던 걸까.


나와 내 감정을 분리해서 보는 일. 내가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내 안에서 피어올랐던 내 마음, 그래서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던 그 마음을, 마치 가위로 살살 오려 내듯이 옆에다 조심히 내려 두었다. 그리고 그냥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과정이 꼭 된장국을 끓일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거름망으로 된장을 풀고 국물에 다른 침전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 그렇게 해야 깨끗한 국물이 되듯이, 내 감정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크고 작고 예쁘고 못생긴 마음이 한데 섞여 있었는데, ‘시간’이라는 거름망으로 가만히 그 시간에 기대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내 마음을 모르는 척하지 않고 어떻게든 알아보고자 하는 시도. 그렇게 걸러진 내 감정을 똑바로 응시하면 불필요했던 감정들이 찌꺼기처럼 분리됐다. 아, 내가 단순히 남편이 약속 시간에 늦어서 화가 났던 게 아니구나.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구나,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설’ 자리에 대한 혼동이 있었구나, 아직 운전에 미숙했고 시간에 쫓겼구나. 그제야 그런 상황이 보였다.


마음은 그렇게 차분해졌고 남편과 다시 이야기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이제 막 일어난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미안해,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랬어.

나도 미안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의 아침으로 돌아와서 매일 먹던 커피를 내리고 과일을 씻고 빵을 구웠다.


‘오늘은 언제 데리러 갈까?’

‘세시. 그런데 조금 천천히 와 줘.’


 ‘그래, 혹시 시간 안 맞으면 블록 몇 바퀴 돌고 있으면 되니까 천천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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