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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니 Sep 09. 2020

제발 내가 설거지하면 안 될까?  

나만을 위한 '틈'

재이는 22개월 차 베이비.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왔던 인풋을 아웃풋으로 내보내기에 몰두하고 있다. 가나다라 표와 숫자, 알파벳 읽는 것에 재미를 들였다. '별', '달', '가자!', '애플주스', '공룡', '거미'등이 최근 자주 내뱉는 말들인데, 그 조그만 입을 오물오물 움직여 단어를 내뱉는 재이를 보자면 마냥 신기하기도 하고, 가슴 벅차게 행복하기도 하다. 단순히 할 줄 아는 말들이 많아져서 좋다기보다는, 그동안 우리의 대화가, 눈빛이, 몸짓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증명 같았달까. 그래, 우리는 늘 함께 소통하고 있었지 아가야.



행복한 요즘을 보내고 있자니, 아기가 생후 3-4개월 무렵이었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 때 나는 조금 위태로웠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늘 아기와 둘이 시간을 보냈는데, 낮잠을 누워서 자지 못하는 아기를 매번 아기띠로 재우던 시절이었다. 적게는 2번 많게는 3번, 매번 2시간씩. 남편이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이미 녹초였다.




남편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시간은 늘 즐거웠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낮시간을 버틴 것이기도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함께 먹을 저녁상을 차렸고, 설거지와 뒷정리는 남편의 몫이었다. 남편이 뒷정리하는 동안에 나는 아기 옆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설거지가 너무 하고 싶어 졌다.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애원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발 내가 설거지하면 안 될까. 내가 뒷정리 다 할게. 자기가 재이랑 좀 더 놀아줘."


당황한 남편은 본인이 다 정리할 테니 아이와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설거지하는 게 쉬는 거야. 내가 할게."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 시기의 아기에게는 하루 종일 엄마의 손과 품이 필요했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기의 시간만 있고 내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 아기는 작고 사랑스러웠지만 내 시간이 철저하게 제한되다 보니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곧이곧대로 느낄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 이후에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나를 위한 '잠시의 틈'에 간절히 목말라있었던 나는, 설거지를 하며 고요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그 틈을 사랑했다. 그 시간만큼은 나만을 위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울음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되었고, 아이에게 입이 닳게 하루 종일 읽어주었던 그림책에서 잠시 멀어져 있을 수 있었다. 그 잠시의 시간을 가지면 신기하게도 지쳤던 마음이 달래 졌다. 아이 얼굴에서도 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꼭 몇 시간씩 혼자 외출을 하거나 하루 이틀 집을 비우지 않아도, 그 짧은 틈은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초짜 엄마 티를 못 벗은 나는 어떤 순간에는 아직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설거지거리 뒤에 내 몸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조금씩 내 시간을 찾고 있다. 더디지만 우리만의 속도로 하나씩 맞춰가고 있다.



식구가 한 명 늘었지만 맞춰나가야 할 것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우리의 아기라서 더 그렇다. 엄마가 되기 이전에는 감히 그릴 수 없었던 순간들. 내가 간절하게 설거지를 자처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맞춰가 보려는 노력이 고마운 밤이다. 내 뜬금없는 말을 이해해준 남편의 노력, 조금이라도 숨을 고르고 아이의 시간에 더 집중해보려는 나의 노력, 그리고 부족한 엄마를 오늘도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아이의 그 순수한 노력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어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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