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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 Jul 11. 2020

아빠의 가족은 어디서부터예요?

7월 11일 AM 8:48

몇 주 전 일요일 오후였다.

일요일은 언제나 그렇듯 아빠는 동네 뒷산으로 등산을, 엄마와 나는 별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카톡, 카톡’ 엄마의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엄마는 약간은 소녀 같은 미소와 조금은 들뜬 말투로

“어머, 살다 보니 네 아빠가 이런 것도 보낸다 얘.”

아빠가 보내온 메시지에는 산 길에 예쁘고 곱게 펴 있는 꽃들이 화면 가득 담겨 있었다.

“응 진짜 예쁘다. 아빠가 이제 조금 로맨틱해지나 보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무뚝뚝, 무심함, 멋없음의 대명사인 아빠가 꽃을 보고 엄마가 생각나서 메시지까지 보내다니! (참고로 아빠는 카톡 메시지 전송에 능숙하지 않다,)

저럴 거면 왜 같이 살까 싶을 정도로 많은 다툼을 목격하며 자라온 나는 두 사람의 변화에 감회의 새로움까지 느껴버렸다.

한참 후 아빠가 집에 왔고 엄마는 한층 자상해진 말투로 ‘점심 메뉴는 비빔국수가 어때?’ 같은 친절함을 보였다.

엄마의 비빔국수는 감칠 나게 맛있었고, 30년 넘게 들어온 송해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익숙한 듯 정겨웠다.

잠시 후 울리는 아빠의 휴대폰.

액정에 비친 이름은 ‘섭이’였다. 안부 차 전화겠지 하고 젓가락에 걸려있는 비빔국수를 마저 말아 야무지게 입 안으로 넣었다.

아빠는 헛기침을 흠 하고선 전화를 받았다.

‘섭이’는 큰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까 아빠 형님의 아들, 아빠의 첫 조카다.

태어난 고향에서보다 서울에서 산 세월이 3배쯤 더 긴데도 불구하고 통화할 때 튀어나오는 아빠의 사투리는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아빠는 섭이 조카의 전화가 많이 반가웠는지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거실을 가로질러 잰걸음으로, 베란다 앞에 다다러서야

“나는 잘 지낸다” “밥은 잘 챙겨 묵고 있나?” “더운데 현장일은 괜찮나?” “꽃 예쁘제?”

한껏 들뜬 목소리로 안부를 주고받는 듯했는데 마지막 말에 아빠, 잠깐만 뭐라고?

통화할 때 워낙 목소리가 큰 편인 덕에 베란다 앞까지 가서 한 통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문장이 들려버린 것이다.

‘꽃 예쁘제?’

나는 내 휴대폰을 얼른 들여다봤다. 혹시 아빠가 나에게도 보내온 꽃 사진을 내가 놓친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역시나, 아빠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소외감 같은 것이 다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아빠가 통화를 마치고 식탁에 돌아왔을 땐 몇 분 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삐죽거리는 마음을 참지 못한 나는 “뭐야, 오빠한테도 보냈어?”

여전히 들뜸이 가라앉지 못한 아빠는 “응, 꽃이 예뻐서 보냈지.” 했다.

휴대폰 조작이 서툰 아빠가 사진을 찍고 친구 목록에서 이름을 검색해서 사진을 첨부하는 공을 들여보낼 만큼 생각이 났던 걸까 섭이 조카가.

아빠는 분위기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현장이 아직 시흥이래. 이천에서 옮겼나 보네.”

또 마음이 툭 건드려졌다.

“아빠, 내가 일하는 회사는 어디에 있는 건지 알아? 아니, 나는 어디로 출퇴근하는지 알아?”

“너? 너희 회사 어딘데?”

나는 반도 채 먹지 않은 비빔국수 그릇을 두고 배부르다는 핑계를 대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섭이 조카는 아빠 형님의 아들, 큰아버지의 아들이다.

아빠의 형님은 내가 8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시골에서 참외 농사지으며 두 아이를 건사할 자신이 없었던 아빠의 형수는 아이 둘을 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맡긴 채 자취를 감췄다.

그때 조카들의 나이는 12살, 10살이었다.

7형제 중 둘째였던 아빠는 졸지에 장남이 되었고, 막중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서울행을 택한 젊은 아빠에게 어떤 꿈과 포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분명했을 텐데 아빠의 서울살이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던 것 같다.

어려운 살림에도 아빠는 유독 ‘자기 형제들’에게 끔찍했는데(엄마의 말이고, 지켜본 결과 엄마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형제애 좋은 형님이 남긴 두 조카가 아빠에겐 어쩌면 자식 이상의 의미로 담기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공공연하게 들어온 말은 ‘섭이가 내 제사에 절하지, 니가 할 거냐’였는데 이 문장에 굉장히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아빠 세대의 ‘모든’ 남성들이 그렇지 않을 테지만 아빠는 유독 아들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토로했고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나와 내 동생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자신의 제사상에 술잔을 올려줄 아깝고 애달픈 섭이 조카는 여러모로 바르게 성장해갔다.

서글서글한 외모, 똑똑한 머리, 예의바름이 깔려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참외 농사를 도우면서도 성적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고 알아서 대학에 척 하니 붙고 알아서 대학원을 진학하고 알아서 대기업에 취직한 섭이 조카였다.

마음껏 형편껏 든든한 지원을 아끼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아빠에게도 책임져야 할 식구가 있으니 게다가 ‘남편 형제들 일’에 조금은 예민한 엄마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마음만큼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같은 것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섭이 조카는 더더욱 크게 아빠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어떤 날 저녁을 먹고 있으면 아빠는 아주 기분 좋은 목소리로(평소에 잘 들어 보지 못하는) ‘섭이가 ㅇㅇ에 취직을 했다더라. 장하다 장해.’라고 소식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땐 마치 남들에게 내 아들이 이만큼 잘났어요!라고 떠드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꽃 사진 한 장으로 터져버린 소외감이지만 줄곧, 내내 마음에 담아둔 질문을 언제고 아빠에게 한 번은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가족은 어디서부터예요?’

아빠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대답은 아마도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런 게 어딨어. 다 가족이지.’




AM 9:50에 끝.

그깟 꽃 사진, 필요 없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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