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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자리에서

+38, 다시 일상으로

by Remi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창밖은 눅진한 안개처럼 고요했고
남편은 조심스레 짐을 챙겨 현관을 나섰다.
나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아이들과 코코는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새벽 비행기 시간에 맞춘 이 이별은
손을 흔들기도, 안아주기도 어색한
그저 조용한 작별이었다.

제주에서 함께한 시간은 겨우 닷새.
하지만 익숙해졌던 그림자가 빠져나가는 그 찰나
생각보다 더 긴 여운이
조용히 가슴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남편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땐
집 안엔 미처 개지 못한 이불과
밤새 널어둔 수건이 그대로 있었다.
그 소소한 흔적들 사이로
함께였던 시간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해맑은 얼굴로 아침을 열었다.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은 아쉬워했지만
곧 서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장난을 치며 깔깔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모든 것이 여전하고 익숙한데
단 하나 그 사람이 빠진 풍경은 낯설 만큼 조용했다.

비워진 의자 하나,
함께 마시던 커피잔 하나,
그리고 문득 입안에 맴도는, 불러보고 싶은 이름 하나.

하지만 허전함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나는 평소처럼 마트에 들렀고

점심을 차리고 세탁기를 돌렸다.
다시, 일상의 리듬에 발을 맞춰야 했다.





제주라는 이 섬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풍경을 품고 있다.
조용한 오후, 빨래 돌아가는 소리 너머로
저 멀리 파도 소리가 잔잔히 들려올 때면
나는 그 안에서
내 마음 한 조각을 다시 꺼내어 정리하게 된다.


사람이 떠난 뒤에야
그 자리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그 빈자리에 오래 머물 순 없겠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조금 느리게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하루를 다시 살아내는 중이다.

제주는 여전히 아름답고
나는 다시 그 안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늘도 비워진 마음 한 켠을 조용히 어루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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